1888년 11월 3일, 佑榮이 李燦和에게 자기 주변의 안부를 전한 후에 상대가 우거하는 곳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한 번 방문하여 축하해야겠지만 아직 시간이 나지 않아 우선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한다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
1888년 11월 3일, 佑榮이 李燦和에게 자기 주변의 안부를 전한 후에 상대가 우거하는 곳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한 번 방문하여 축하해야겠지만 아직 시간이 나지 않아 우선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한다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이다.
먼저 소식이 막힌 데 따른 서운함을 다 말할 수 없으나 산천이 가리고 있어 형편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하고 매번 그리워하고 있던 때에 다행히 지금 온 인편을 통하여 상대가 인접한 마을로 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쁜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고, 동짓달의 추위에 객지에서 공부하는 생활은 신명의 도움이 있는지 묻고, 아버님의 근황을 이어서 들을 일이 없으니 염려가 된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위로 양대 어른의 건강이 늘 편안하지 못하니 애타는 마음을 말하기 어렵다고 하고, 자신의 伯兄은 어제 杜堂에서 겨울을 날 작정으로 거처하기 시작하였는데, 혹한을 잘 지낼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다만 상대가 객지 생활하는 곳이 활 두어 바탕 거리이니 직접 가서 축하해야겠지만, 아직 속무에 쫓기어 좋은 인연을 만날 겨를이 나지 않으므로 우선 몇 줄 편지를 써 보낸다며 부끄럽다는 마음을 전하였다.
발신인 佑榮의 신상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1923년 구계서당에서 도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에 裵佑榮이라는 사람이 柳晦植 등과 회원으로 연명한 기록이 있고, 이 편지에 자신을 戚弟라 하였으니, 이찬화의 생가 조모인 達城裵氏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800년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에 활동한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수신인 이찬화(1843~1925)는 자가 齊佰, 호는 可山이다. 생부는 兜溪 李孝永으로 동지중추부사 李晩恁에게 입후하여 宗系를 이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