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12월 그믐께 李亨秀가 柳致喬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한 상대의 부탁을 정중히 사양하고, 상대의 堂號가 친지 집안 선조의 휘와 관계가 되니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글자로 바꿀 것을 제안하며, 보내 준 화답시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60년 12월 그믐께 李亨秀가 柳致喬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한 상대의 부탁을 정중히 사양하고, 상대의 堂號가 친지 집안 선조의 휘와 관계가 되니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글자로 바꿀 것을 제안하며, 보내 준 화답시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반 년이나 그리워하던 중에 두 차례 편지를 받고 자신이 어떻게 상대의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아량을 입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세 번 반복해서 읽고 아침저녁으로 산하와 같이 아득히 멀어졌다는 말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섣달도 다 지난 때에 상대의 건강은 좋으며 아우님의 병환도 완쾌되어 함께 우애롭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니 위로가 된다고 하고, 세상사가 종종 좋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道를 아는 사람의 말이니, 신년에 다시 끄집어 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늦겨울 2달 송구영신의 이시기에 턱이 붓는 증세로 침석에 누워 앓느라 세상을 사는 재미가 없고 다만 노경의 감회만 가득할 뿐이라 하였다.
부탁한 글은 상대의 문내에도 대방가가 있는데 멀리서 거친 솜씨를 빌리려 하니 장난인 줄 알았다며, 그런데 실제로 붓과 종이를 보내니 장난이 아니었다 하고 상대에게 기대한 일이 아님을 전하였다. 또 당호에 대해서는 상대가 분수를 지키며 만년의 공부에 침잠하려는 뜻을 볼 수 있으나 친지의 집안 선조의 諱와 같으니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글자로 대체하라고 제안하고, 자신의 시에 화답하여 보내준 시는 격조가 古澹하여 모과를 보배로 갚은 셈이라 잊을 수 없다고 치하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안 서원의 직임에서 사임한 것은 가까운 예로 비추어볼 때 당연하나, 이로 말미암아 만남이 더욱 기약이 없어질 것이니 서운하고 한스럽다고 하였다.
발신인 李亨秀(1784~1870)는 본관은 固城, 자는 賢民, 호는 霽谷이다. 아버지는 周生이다. 金鵬運을 사사하고 학행으로 자질을 이끌어 향내의 중망이 있었다. 저술로 『無鏡錄』, 『過希稿』, 『耋言』 등이 있고 문집으로 『霽谷集』이 전한다. 아들 李庭嶷이 柳致堯의 딸과 혼인하여 두 집안이 사돈 관계를 맺었는데, 류치요는 스물 둘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수신인 柳致喬(1790~1862)는 자가 叔久, 호는 守齋이다. 호고와 류휘문의 長子이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