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 12월 9일에 李亨秀가 柳致喬 형제에게 仲氏 부인의 초상에 형제를 위로하고 눈에 길이 막히어 자신의 며느리를 즉시 보내지 못한다는 전갈과 초종에 필요한 물품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55년 12월 9일에 李亨秀가 柳致喬 형제에게 仲氏 부인의 초상에 형제를 위로하고 눈에 길이 막히어 자신의 며느리[망자의 딸]를 즉시 보내지 못한다는 전갈과 초종에 필요한 물품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仲嫂夫人[상대 형제들 중 둘째의 부인이 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은 천만 뜻밖으로 규문의 아름다운 덕을 사돈이 된 자신도 일찍이 들었었다 하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는데도 끝내 상을 주관할 喪主도 없으니 조물주의 뜻을 진실로 알 수가 없다고 애통해하였다. 이어서 여러분들의 옛 슬픔과 새 통한이 다른 사람과는 더욱 다를 터인데 어찌 견디며 지내는지 염려하고, 염습에 필요한 물품은 창졸간이라 하더라도 빠뜨릴 수 없을 터인데, 예법대로 준비가 되었는지 물었다. 자신 쪽에서는 심부름꾼이 어제 오후에야 도착하여 며느리가 눈길을 뚫고 밤길을 떠날 수 없으므로 入官 전에 당도하지 못할 듯하다고 하며, 그 아이가 근친도 하지 못하고 자주 편지도 드리지 못하다가 졸지에 凶報를 들었으니, 길가는 사람처럼 지낸 그 심경을 위로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또 장례 절차가 이 때문에 늦어져서 기다리고 있을 듯한데, 이 심부름꾼이 일찍 도착하기를 바라며, 초종 절차를 잘 치르고 보중하기를 빈다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편지 중에서 옛 슬픔과 새 통한이라 한 것은 형제의 중씨 류치요(1793~1814)가 요몰한 일과 그 부인 안동 권씨(1796~1855)가 이때 세상을 떠난 사실을 가리킨 말이다. 안동권씨는 18세의 나이에 청상이 되어 이 해 1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全州柳氏族譜』에는 몰년을 병진년으로 적고 있으나 을묘년의 오인일 듯하다. 며느리는 류치요의 딸로 발신인의 아들 李庭嶷과 혼인하였다.
추신으로 명주저고리, 명주 솜바지, 명주 조끼, 돈 한 꿰미를 보낸다는 物目을 적었다.
발신인 李亨秀(1784~1870)는 본관은 固城, 자는 賢民, 호는 霽谷이다. 아버지는 周生이다. 金鵬運을 사사하고 학행으로 자질을 이끌어 향내의 중망이 있었다. 저술로 『無鏡錄』, 『過希稿』, 『耋言』 등이 있고 문집으로 『霽谷集』이 전한다.
수신인을 류생원 첨문이라 한 것은 류치요의 형제인 柳致喬(1790~1862)와 柳致朝(1790~1862)를 가리킨 말이다. 류치교는 자가 叔久, 호는 守齋이다. 류치조는 자가 叔夏이다. 柳徽文의 장남과 삼남이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