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 7월 24일 李秉夏가 柳致喬에게 「太極圖解」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교정해 달라고 부탁하고, 三峴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에 자신의 볼 일을 겸하여 갈 것임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49년 7월 24일 李秉夏가 柳致喬에게 「太極圖解」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교정해 달라고 부탁하고, 三峴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에 자신의 볼 일을 겸하여 갈 것임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國喪에 대하여 신민의 애통이 끝이 없다고 서두를 연 뒤, 서울에서 십 년 동안 이웃이 되어 지낸 것은 기이한 일인데, 오늘 이별은 오래된 계획이므로 깊이 한탄할 것은 아니나 이후로 소식이 멀어질 것이니, 아득한 산천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음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편지로 회포를 말하려다가 뜻대로 하지 못하였는데도 넓은 아량으로 먼저 안부를 물어주니, 돌보아주는 어진 마음이 석별의 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감사한 마음을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가을 기운이 생겨났으나 오랜 비가 온전히 개지 않은 이때, 건강과 공부의 근황이 좋으며 아들과 손자도 잘 지낼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에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골짜기 하나를 차지하여 유유자적하는 생활이 王弇州의 이른바 "번뇌와 欽羨도 없어지고 親誼와 원망도 잊었다."고 한 말에 가까우니, 십 년 가까운 세월을 큰 나무 아래 머리를 눌려서 꼼짝할 수 없었던 자로서 조금은 쾌활한 일이지만, 다만 객지 생활에 게을러진 지가 오래라 유익한 사우의 도움을 구하려 해도 沙村 老人도 병 조섭 중이라 왕래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촌내 한두 명의 젊은이와 과거 공부만 일삼고 있으니, 70나이의 노경에 승려나 도인처럼 되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태극도해」의 의미에 대해서는, 상대의 깊은 공부가 달리 마음을 쓰려 해도 그럴 수 없어서 밤낮으로 서로 도우는 공부가 무익하지 않을 것이니 매우 훌륭한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한가한 틈에 논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뜻에 차지 않겠지만 혼자만의 견해로 쓴 글이 스스로의 한 부 의리가 되었다 하고, 상대의 처방으로 십여 년의 고질병을 만회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어서 요사이의 안부를 묻고 三峴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은 여러분의 초청에 감히 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크게 긴급한 볼일이 있으므로 가을 기운을 타고 한 번 나아가려 한다고 하고, 그러나 근래에 병으로 인한 게으름이 심하여 반드시 그렇게 될 지는 미리 점치기 어렵다며 다만 갈 일이 있을 때 도모하겠다고 하였다.
발신인 李秉夏(1780~1852)는 본관은 韓山, 자는 忠立, 호는 信庵이다. 할아버지는 約窩 李顯靖이고 아버지는 李{土+敬}이다. 학행으로 향내의 중망이 있었다. 안동 소호리에 살았다. 三山 柳正源의 셋째 집 손자 柳道文의 딸에게 장가갔으므로 柳致喬에게는 재종매부가 된다.
수신인 류치교(1790~1862)는 자가 叔久, 호는 守齋이다. 류휘문의 長子이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