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년에 柳致明이 안부를 전하고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사직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말하기 위해 金建銖에게 쓴 편지
1834년에 柳致明(1777~1861)이 안부를 전하고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사직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말하기 위해 金建銖(1790~1854)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는 수신자가 먼저 편지를 보내와 이에 대해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필자인 류치명은 관직의 제수된 후 사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차례로 전하였다. 그는 同副에 제수되어 바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純祖가 우연하지 않은 뜻이라며 다시 承宣에 特除하였다. 그래서 이미 肅拜하였고, 宿直한 지가 여러 날 지났다고 하였다. 현재는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나 동료들이 만류하고, 또 도승지가 없는 데 사직서를 올리는 것은 承政院의 관례가 아니라서 못하고 있으며, 도승지가 들어오는 내일 사직서를 올리려고 한다고 하였다. 한편 상대방과 張兄이 있는 곳은 멀어서 만나지 못하고 또 바빠서 張兄에게는 따로 안부를 전하지 못하다고 하였고, 끝으로 여러 가지 만날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추신으로 鄭兄의 일을 결정이 없어서 근심스럽고, 땔나무를 구하는 일은 문제가 없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발신자인 류치명의 본관은 全州, 자는 誠伯, 호는 定齋이다. 父는 柳晦文이고, 母는 한산이씨이며, 외증조부는 李象靖이다. 安東 大平에 거주하였다. 1805년(순조 5) 문과에 급제한 뒤 공조 참의, 대사간, 한성좌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다가 만년에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李滉→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栽→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문하에 李震相, 柳宗喬, 李敦禹, 權泳夏, 李錫永, 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 『禮疑叢話』·『家禮輯解』·『常變通攷』·『太極圖解』 등이 있고, 문집으로 『定齋集』이 있다.
수신자는 피봉의 明齋 直中이라는 표현을 보아 1834년(순조 34) 10월 당시에 明陵別檢으로 있던 김건수로 보인다. 김건수의 본관은 義城, 자는 公立, 호는 晩悔軒이다. 父는 金在仁이고 安東 海底(현재는 봉화에 소재)에 거주하였다. 183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834년에 明陵別檢에 제수된 뒤에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고, 이후에 외직으로 현풍, 창녕, 청도, 양산, 영산·김해의 수령을 지냈다. 후에 승정원 우승지까지 올랐다. 저서로 『晩悔軒集』이 있다. 명릉은 肅宗과 계비인 仁顯王后 閔氏, 仁元王后 金氏의 능을 말하며 경기도 고양에 있다.
『全州柳氏大同譜』,
1차 작성자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