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8월 1일, 의성의 사촌 金川進이 柳健休에게 안부를 전하고 손녀를 지금 보내는데 평소 가르침이 없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을 터이니 일마다 잘 이끌어 큰 탈이 없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33년 8월 1일, 의성의 사촌 金川進이 柳健休에게 안부를 전하고 손녀를 지금 보내는데 평소 가르침이 없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을 터이니 일마다 잘 이끌어 큰 탈이 없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한 달 전쯤 보내주신 답장 편지는 아직까지 감사하다 하고 가을이 시작되었는데 상중의 기거는 평안하시며 아들과 상주가 된 손자는 잘 견뎌 지내는지 물었다. 또 장례 날짜를 잡고 산지는 알아보았는지 궁금하다 하고 눈앞에 보이는 정경이 참고 견딜 수 없는 지경일 것이니 자신의 마음에도 슬프고 그립다고 하였다. 자신의 안부에 대해서는 숙환이 가을이 되도록 낫지 않고 아들의 종기가 요즈음에야 다 나았지만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고 고민 중인 심경을 전하였다. 또 손녀를 지금 보내는데, 지난번에 앓던 눈병이 아직 시원하게 낫지 않은 데다 원래 둔한 자질에 집안의 음식을 맡아보는 소임을 갑자기 담당하게 되었으니, 눈에 거슬리는 점이 많더라도 잘 이끌어 가르쳐서 큰 탈이 없도록 해 주시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하였다.
편지 내용 중에서 손자를 상중이라 일컫는 한편, 눈에 보이는 정경이 참고 견딜 수 없을 것이라 위로한 점으로 볼 때 상대의 며느리가 세상을 떠나 막 장사를 치르려는 시점이며, 또한 자신의 손녀가 상대의 손자 致思(1817~1834)와 혼인한 후 근친 중에 있다가 지금 막 시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발신인 金川進(1759~1841)은 본관은 安東으로, 字는 順光, 호는 沙村이다. 義城 沙村에 살았으며 容淵 金宗發의 아들이다. 경주 香壇의 外舅 李憲周와 장조부인 百弗庵 崔興遠에게 배워 학문의 요점을 얻었다. 과거에는 뜻이 없어 오직 위기의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先考 四兄弟의 유고를 편집간행토록 하였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