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12월 20일에 徐元模가 大埜 柳健休에게 세밑 안부를 묻고 寢郞丈으로 일컬어지는 어른의 별세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전한 후, 자신을 문하에 받아들여 끝내 소인으로 귀결되는 것을 면하게 해 주기를 청하는 편지
1832년 12월 20일에 徐元模가 大埜 柳健休에게 세밑 안부를 묻고 寢郞丈으로 일컬어지는 어른의 별세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전한 후, 자신을 문하에 받아들여 끝내 소인으로 귀결되는 것을 면하게 해 주기를 청하는 편지이다.
먼저 지난 번 헤어진 후에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상중의 슬픔 가운데서도 흠모하는 마음은 하루도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로 서두를 꺼낸 다음, 섣달의 추위에 근황은 어떠하며 함양하는 생활에 신명의 도움이 있는지, 아드님의 건강은 좋은지 묻고, 원근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학사에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모여든다고 하니 송축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침랑장의 喪事는 유림의 운수에 관계되는 일로 후진들이 모두 애통해하는 일인데 더구나 한 문중에서 의지하며 한 마을에서 도의로 밀접한 사이에 슬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하며 위로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작년 이래 남들이 견딜 수 없는 참화를 당하여 여러 가지 가련한 정상을 다 말할 수 없으나 70 노령의 어버이를 위로할 길이 없어 여러 병환이 겹쳐 이르니 두렵고 애타는 마음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할 뿐만이 아니라 하였다. 그리고 지난겨울 죽은 아들을 매장하던 때에는 가친에게 대신 조문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아이에 대해서는 뇌문을 보내어 애도하였는데 그 탄식하여 위로하는 뜻과 홀로 된 마음과 슬퍼해 준 마음이 상정을 훨씬 벗어나니, 유명 간에 입은 은혜가 참으로 크다고 하였다. 그에 감사하는 마음은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는 풀을 묶더라도 갚을 수 없을 것인데도 근심과 슬픔에 겨를이 없어 아직도 사례하는 편지를 올리지 못하였으니, 후의를 저버렸을 뿐 아니라 후생으로서 좋은 가르침을 구하는 도리가 아니어서 죄송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그지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자신을 생각하건대 慕洞과 瓢溪[박실]에 계시던 선생 장자들의 가르침 덕분에 대략이나마 학문의 실마리를 얻었으나, 자질이 못나고 의지가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師門에 누를 끼쳤을 뿐이라 하고, 갑자기 석학이 돌아가신 데 대한 탄식이 생기니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듯하여 더욱 땀이 흐른다고 하였다.
다만 한 가닥 하늘로부터 품수한 지식은 기구한 경황을 겪은 나머지에도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으니, 아침저녁으로 장석을 가까이 모시고 제자의 자리에 몸을 맡겨 스승을 본받아 스스로를 단속하여 장래의 과실을 면할 수 있다면 장차 소인으로 돌아가는 면할 수 있을 듯하다고 하며, 문장께서는 이러한 정상을 가엽게 여겨 혼미함을 이끌어주어 못난 자신으로 하여금 존심하여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또 校理장께서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숙배에 나갔는데 다시 자급이 올랐다고 하니 우리 유림이 축하할 일이라 하고, 그 사이에 來鳳형을 만나 담소를 나누었으나 한만한 만남일 뿐이라 부끄럽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세모가 멀지 않았는데 송구영신의 때에 복이 많기를 기원한다고 하며 글을 맺었다.
발신인 徐元模는 1787(정조 11)~1858(철종 9). 본관은 達城, 자는 善膺, 호는 周南으로 청송의 馬坪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邁埜 徐活이다. 柳健休의 문인으로 유고 4책이 있고 남긴 기록으로 「師門飮河錄」과 「達城趾美錄」이 있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