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2월 17일, 南漢模가 柳健休에게 유집 간행을 시작하였음을 알리고, 제반 일을 수의하는 모임도 그만 둘 수 없으니, 한 번 왕림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32년 2월 17일, 南漢模가 柳健休에게 유집 간행을 시작하였음을 알리고, 제반 일을 수의하는 모임도 그만 둘 수 없으니, 한 번 왕림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간찰이다.
먼저 西林의 지난 일은 벌써 오래 전 일이 되었으니 상대방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평범하지 않은 까닭이지만 갑자기 버려짐이 심하여 아직 문안 편지조차 쓰지 못하였는데 어찌 상대가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새해가 된 지도 여러 날이 된 이때에 체후는 만중하며 세상을 벗어나 조용히 거처하며 독서하는 즐거움에도 새로운 맛이 있어 자신처럼 어리석은 이를 일깨울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근래의 생활이 좋은 경황이 없어 끝내는 小人이 되고 말 것이라 자탄하였다.
본론으로 遺集의 板刻을 막 刻手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한 번 모이는 일 또한 그만 둘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일을 상대가 아니면 누구와 의논하겠느냐 하며 즉시 한 번 왕림하여 대사를 완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아 오래 지체할 수 없다는 것도 함께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유집 판각의 일이란 損齋 南漢朝의 『損齋集』 판각을 뜻하는 듯하다. 『손재집』의 해제에 의하면, 立齋 鄭宗魯의 『입재집』이 준비 과정을 거쳐 1835년에 간행되었다는 점과 판본이나 글씨가 유사한 점으로 비추어 볼 때 두 문집의 판각이 비슷한 시기에 함께 진행된 듯하다고 하였다.
발신인 南漢模는 생몰과 활동 연조 등이 자세하지 않다. 다만 立齋 鄭宗魯나 好古窩 柳徽文 등 학자와의 왕복 기록으로 볼 때 18세기 초중기를 주 생애로 산 듯하고 자가 元禮라는 것이 확인되고, 『손재집』 간행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손재의 재종제 誠齋 南漢皓(1760~1821)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는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류장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