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3월 21일, 이병하가 류휘문에게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은 데 대하여 군자의 성덕이라 치하하고 조만간 찾아 뵐 것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31년 3월 21일, 이병하가 류휘문에게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은 데 대하여 군자의 성덕이라 치하하고 조만간 찾아 뵐 것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서두에서 외진 집에 칩거하고 있으니 상대의 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니 바라보며 마음만 달려갈 뿐이라 하며 화창한 봄날씨에 상대의 건강과 아들 여러분의 근황을 물었다.
지난번의 벼슬에 제수된 것은 기대 밖의 일로, 초야에서 60년을 쌓은 공부가 이미 풍부하고 정밀하니 모든 사람이 기뻐할 일이라 하고, 그러나 초야에서 청빈하게 지내며 나아가지 않았음을 듣고 군자다운 출처 대의에 더욱 감복했다고 하였다. 다만 오늘날 士習이 투박해지고 正道가 사라져가는 때에 한번 나아가 사람들로 하여금 한 글자 ‘公’의 의미를 알게 한다면 어찌 世敎를 만회할 기회가 되지 않았겠는가 하며 아쉬운 마음도 함께 전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부모를 여읜 후 고향을 떠나 살면서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하였던 까닭이 三檟亭에서 서로 어울리며 지냈던 덕분이라 생각하는데, 뜻밖에 그 둘째 형을 곡하게 되었다 하고, 이제 세상에서 그 온화한 거동과 높은 덕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임을 전하였다. 마음속으로 상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상대가 객지를 떠돌다가 이어서 조문 갈 일이 생겨 오랜 여행에서 막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조만간에 찾아뵈려 하다가 다시 용무에 골몰하느라 아직 기일을 정하여 알려드리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편지에서 언급한 三檟亭은 현종 15년에 柳奉時가 두 아들 升鉉과 觀鉉의 공부를 위해 臨東의 渭洞으로 이사하여 지은 서재이다. 1922년에 임동면 박곡리로 옮겼으나, 임하댐 수몰지역에 편입되어 1987년 선산 해평면 일선리로 옮겨졌다.
발신인 李秉夏(1780~1852)는 본관은 韓山, 자는 忠立, 호는 信庵이다. 할아버지는 約窩 李顯靖이고 아버지는 경{土+敬}이다. 학행으로 향내의 중망이 있었다. 안동 소호리에 살았다.
수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