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8월 6일에 金會運이 柳健休에게 그동안 여러 가지 인사를 빠뜨린 것은 벽촌에 우거하는 중이라 인편을 찾기 어려워서였음을 알리고 그 밖의 여러 지명인사들의 근황과 詩板 등의 진행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31년 8월 6일에 金會運이 柳健休에게 그동안 여러 가지 인사를 빠뜨린 것은 벽촌에 우거하는 중이라 인편을 찾기 어려워서였음을 알리고 그 밖의 여러 지명인사들의 근황과 詩板 등의 진행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간찰이다.
서두에서 뜻밖에 받은 편지는 지난 가을에 만난 후 처음 대면하는 듯하여 무리들을 떠나 쓸쓸히 지내는 마음에 크게 위로가 되었지만 보낸 날짜가 6월 20일 경인데 도착한 날짜가 7월 10일 사이이니 어디서 지체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요즘에 듣자니 상대방이 거주하는 곳에 沴氣가 아직 깨끗이 멎지 않았다는데 옮겨 사는 곳의 생활이 서재에서 거처하는 것만큼 조용하고 편안하지는 못하겠지만 공부는 가는 곳에 따라 있어야 하는 일이니 우거중의 근황과 아드님의 공부하는 상황이 더욱 안온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주변에 대해서는 본래 가계가 일정하지 못하여 이른바 ‘시름겹게 살아간다.’고 한 것이 바로 자신의 근황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화답하여 보낸 시는 시어가 원만하고 좋을 뿐만 아니라 규계한 내용이 정문일침의 좋은 충고였다고 하며 보배롭게 간직하면서 반성하는 자료로 삼겠다고 하였다.
또 錦陽의 유적을 읊은 시는 이미 시축 속에 붙였다 하고, 이는 귀 무실[水谷] 문중에서 먼저 보낸 것이니 여러분들이 계속하여 화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公晦가 참봉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은 뒤 마땅히 하례하는 편지가 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고, 誠伯이 천리 먼 길을 갔다 온 후에 초상과 귀양을 가는 일이 함께 생겼으나 또한 위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외진 곳에 사느라 인편을 찾을 수가 없어서였지만, 끝내 마음에 불만스럽고 한스러운 점이 있어 차운한 시에서 두 사람을 언급하였으니, 잊지 못하는 뜻으로 받아달라고 하였다. 또 以凝에게 현액의 글씨를 쓰게 할 일은 다시 아드님이 소식을 알려주어야 하므로 시를 보게 하였다고 하였다. 洛瑞는 일전에 겨우 그 아우의 성복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은 큰 병을 앓은 후에 별 다른 후유증은 없는 것으로 들었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아들은 일전에 돌아와 우거하는 재사에 머물고 있으니 번거롭게 알려 드릴 일이 없으며, 자신은 마침 川上에 도착하여 遯坡 노인을 만나 바삐 편지를 부치느라 예를 갖추지 못한다고 하였다.
편지 가운데 언급된 錦陽은 지금의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인데 葛庵 李玄逸이 강학하던 금양서당이 있었다. 또 거명된 사람 중, 公晦는 柳徽文의 字인데, 호는 好古窩이다. 誠伯은 柳致明의 자이고 호는 定齋이며, 以凝은 金羲壽의 자이고 호는 東園이다.
발신자 金會運(1764~1834)은 본관은 義城, 자는 亨萬이고, 호는 月梧軒이다. 할아버지는 秋村 金翼漢이고, 아버지는 金始晋이다. 안동 임하의 추월리에서 태어나 雨皐 金道行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20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進取에 급급하지 않고 성리서에 전념하였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는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류장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