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9년 7월 20일에 안동 임하 대평의 柳徽文이 葛庵 李玄逸의 무덤 이장 모임에 참여 여부를 알려달라고 안동 일직 소호리의 한산 이씨에게 보낸 편지
1829년 7월 20일에 안동 임하 대평의 柳徽文(1773~1832)이 葛庵 李玄逸의 무덤 이장 모임에 참여 여부를 알려달라고 안동 일직 소호리의 한산 이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林齋에서 상대방을 열흘 동안 뵌 것은 대개 근년에 없던 바로 돌아올 적에 문득 배는 부르나 마음은 섭섭했다고 하였다. 하물며 막내 형께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런 빌미로 크게 손상됨에 이르렀고 거듭 일전에 피로가 있어 속이 뒤틀렸으니 손절이 더해졌을 것이라고 하면서 슬픔과 그림이 절절하다고 전하였다. 본인은 빈둥거리며 지내는 궁핍한 생활에 족히 드릴만한 말은 없으나 집안의 근심이 두루 엄습하고 誠伯도 좁은 집에서 더위를 먹어 여러 날 건강하지 못하여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편지의 본론은 갈암 이현일의 무덤 이장에 관한 것이다. 지난날 士珍 형이 출발할 때에 갈암 선생의 무덤은 본손가에서 이장할 큰 계획이 이미 정해졌다고 언급했는데, 이 일은 사문의 큰 일로 사체도 정중할 뿐만 아니라 길지를 얻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마땅히 한 번의 모임이 있어야 한다고 계형이 일찍이 약속한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갑자기 날이 정해지고, 형께서 다시 午洞으로 편지를 보내어 이번 달 27일~28일경 石堡에서 머물며 기다릴 것이라고 했는데, 요청하는 것이 매우 은근했고, 집사 여러 형제들에게는 바람이 더욱 깊었다고 전하였다.
발신자는 이 일에 있어서 한번 가는 것을 힘쓰지 않을 수 없으나 장차 元履의 거취를 보고 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장공의 溪院 행차로 지방의 선비들이 『近思錄』 강의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은 근세의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진퇴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나 여러 형제분들은 이번 일을 특별히 생각하여 부응할 것이라고 여기며, 이 같은 상황을 인편을 통해 알리니 생각하고 논의한 것을 자세하게 적어 참여의 여부를 알려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발신자 류휘문의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萬休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로 顯東의 딸이다. 柳長源의 문인이다. 1830년에 후릉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2년 뒤에 장릉참봉이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일생을 학문과 후진양성에 바쳤으며 南漢皓, 趙承粹, 柳栻, 李秉運, 李秉遠,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경서에 밝았으며, 『好古窩文集』, 『周易經傳通編』, 『啓蒙通解』, 『啓蒙翼要』, 『啓蒙攷疑』, 『近思補錄』, 『近思後編』, 『家禮攷證』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