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9년(순조 29) 8월 29일에 李游夏(1767~?)가 상대방의 편지 내용에 둘째 아들의 상이 있음을 알고 건강의 손상됨이 없게 하라는 당부를 전하기 위해 쓴 편지
1829년(순조 29) 8월 29일에 李游夏(1767~?)가 상대방의 편지 내용에 둘째 아들의 상이 있음을 알고 건강의 손상됨이 없게 하라는 당부를 전하기 위해 쓴 편지이다.
편지 서두에 헤어진 뒤에 소식은 여름이 지나가도록 막혔으니,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에 그야말로 그립고 서운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곧 紀汝 형이 방문함에 상대방의 편지를 받은 것은 곧 봄 사이에 보낸 것인데, 몇 차례 편지를 살펴봄에 마음을 털어놓은 듯 시원한 것이 상대를 대하는 듯하다고 하였다.
이어서 편지 끝에서 말한 것을 보고 삼가 월전에 둘째 아들의 상이 있음을 알았으니, 놀랍고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하겠냐고 하였다. 오직 바라는 것은 西河의 경계를 깊이 간직하여 늘그막의 건강에 손상됨이 없게 하는 것이니, 그것이 멀리 있는 사람의 정성에 위로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하의 경계라는 것은 子夏가 서하에 있을 때, 자식을 잃고 너무 슬퍼한 나머지 소경이 되었다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자신은 여덟 달 동안 弘文館에 있으면서 아직 관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사이 서간으로 인하여 거듭 견책교지를 받아 마음 졸이며 나날을 보내고 있고, 게다가 제사가 거듭되어 쇠한 몸을 거의 지탱하기 어려우니 근심스럽고 가련할 뿐이라고 하였다.
형 집의 선조에 관한 일은 우리들이 함께 원통하고 걱정하던 것인데, 이번 일은 또한 힘써 誠意를 쌓은 것에서 나왔을 뿐이라고 하였다. 앞서 말한 선조에 관한 일은 곧 玉川 趙德隣(1658~1737)의 伸寃을 위해 조정에 요청하는 일인 듯하다. 이어 형이 올라올 수 없어서 젊은이를 대신 보내니, 이것으로 더욱 형이 연로하고 기운이 쇠한 것을 알게 되어 슬퍼 탄식하는 감회가 절실하다고 하였다. 끝에는 겨우 陵幸을 갔다 와서 병이 들고 피로해서 이만 줄인다고 하였다.
발급인 이유하의 자는 景學, 본관은 全州이다. 부친은 李益誠, 동생은 李澤夏이다. 1795년(정조 19) 문과에 급제하였다. 1806년(순조 6) 正言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죄인 金履秀‧李選 등의 처벌이 시행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여 유배형의 집행을 건의하였다. 1822년 함경도 암행어사 趙寅永으로부터 北靑府使로 재직하던 당시 저질렀던 잘못을 지적당하여 처벌을 받았다. 1829년 備局을 통해 御使에 적합한 인물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이후 副校理‧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