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년 4월 22일 李秉夏가 복제 중의 柳徽文에게 從兄 柳宗文의 상사에 대하여 장삿날에 임시하여 곡할 예정이라 하고, 錫汝 兄의 초상에 대하여서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27년 4월 22일 李秉夏가 복제 중의 柳徽文에게 從兄 柳宗文의 상사에 대하여 장삿날에 임시하여 곡할 예정이라 하고, 錫汝 兄의 초상에 대하여서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三峴에서 잠깐 만난 후 서운한 마음이 잊히지 않았었는데, 지난번 상대가 高山에 다녀갔을 때는 이미 떠난 후에야 소식을 들어 매우 섭섭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초상이 난 지 한 달이 넘도록 장삿날을 정하지 못한 것은 訟事 때문이어선지 묻고, 여러 상주의 효성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한데도 말세의 풍속이 옛날 같지 않다며 잘 해결되었는지 궁금해 하였다.
자신은 고인에게 지나친 사랑을 입었고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남 못잖은데도 근래에 좌도에 사느라 오랫동안 뵙지 못하는 사이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하고, 달려가 곡하려 하나, 내달에 드는 자신의 아버지 기일과 장삿날이 묘하게 겹치니, 이달 그믐 사이에나 가서 위문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이 또한 어머님의 병환이 봄을 지내면서 위독해진 관계로 하룻밤을 머물기 어려워 장삿날 임시에야 가볼 듯하다고 하였다. 또 자신이 보내는 輓詞는 고인의 덕을 현양하지 못하고 다만 그 덕을 사모하는 정성만을 담았을 뿐이라 하고, 인편이 돌아오는 길에 평가해 보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어서 석여 형이 참으로 죽었는가 물으며, 효우가 깊었던 행실과 선비다운 아담한 안범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을 탄식하고, 상대가 10년 동안 이웃으로 지냈던 정은 갑절이나 깊을 것이라며 위로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또 溫惠 丈은 평안하신지 묻고 직접 편지를 드리는 것이 번거로워 문안드리지 못하니 이 한스러운 뜻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류종문(1744~1827)은 자가 漢卿인데, 이해 3월 13일에 세상을 떠났고, 석여 형이란 李海永(1775~1827)이다. 본관은 載寧으로 考齋 李槾의 후예이며 자가 석여, 호는 林廬이다. 맛재[午峴]에 살았다.
발신인 李秉夏(1780~1852)는 본관은 韓山, 자는 忠立, 호는 信庵이다. 할아버지는 約窩 李顯靖이고 아버지는 李{土+敬}이다. 학행으로 향내의 중망이 있었다. 안동 소호리에 살았다. 三山 柳正源의 셋째 집 손자 柳道文의 딸에게 장가갔으므로 柳徽文에게는 종질서가 된다.
수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