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년 윤5월 5일에 柳徽文이 蘇湖里의 미상의 수신자에게 형님의 장례를 치른 후에도 집안 안팎으로 상사가 잇달아 애통하다 하고, 자신은 발을 다쳐 운신이 어려운 근황을 전하며 지난 번 형님의 상사에 만사를 보내준 데 대하여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27년 윤5월 5일, 柳徽文이 蘇湖里의 某人에게 형님의 장례를 치른 후에도 집안 안팎으로 상사가 잇달아 애통하다 하고, 자신은 발을 다쳐 운신이 어려운 근황을 전하며 지난 번 형님의 상사에 만사를 보내준 데 대하여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소호리는 대산 이상정의 후예인 韓山李氏가 세거하는 안동 일직면 소호리를 가리킨다.
먼저 근간에 재앙을 당한 이래로 옛일을 생각할 때마다 상대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상대가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주어 감사하다 하고, 이 5월에 慈堂의 병환은 나으시며 상대방도 형제가 안온하게 잘 지내는지 물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어느덧 형님의 장례를 치렀는데, 또 宗家의 孫子가 일찍 세상을 버리고 족형의 후사가 된 조카 致韶가 외간상을 입은 것이 모두 집안의 액운이라 슬픔과 근심 속에 지낸다 하고, 지난번 高山에 갔을 때는 상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발을 다쳐서 아직도 비틀거리며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안간힘을 쓰는 중이라는 근황을 전하였다.
또 錫汝 형이 8년 동안 이웃이 되어 살던 형제와 같은 벗으로서 9순의 아버지보다 앞서 세상을 버리니 士林이 지금부터 더욱 쓸쓸해질 듯하다며 안타까워하였다. 마지막으로 지난 번 형에 대한 挽詞는 묻혀버릴 뻔한 평일의 행적을 표현해 주었다 하고, 장례 기일을 임박하여 알리느라 원근에 널리 통서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뜻을 전하였다.
편지 속에서 언급한 종가의 손자는 바로 이해 4월에 세상을 떠난 柳家鎭(1795~1827)이며, 조카 치소는 생부가 炳文으로 족형인 류세문의 후사가 되었다. 錫汝 형이란 李海永(1775~1827)이다. 본관은 載寧으로 考齋 李槾의 후예이며 자가 석여, 호는 林廬이다. 맛재[午峴]에 살았기 때문에 7년 동안 이웃이 되어 살았다고 하였다.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