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11월 초10일, 柳徽文이 아들의 초례에 관련된 禮와 『桂苑筆耕』의 詩稿 및 최치원의 문장력에 대해 상대방에게 전하는 편지
1824년 11월 초10일, 柳徽文이 아들의 초례에 관련된 禮와 『桂苑筆耕』의 詩稿 및 崔致遠의 문장력에 대해 상대방에게 전하는 편지이다.
류휘문은 묘도에서 叔公과 만났을 때 이야기를 잘 나누지 못 했고, 장남 柳致喬(1790~1862)와 막내 柳致朝(1804~1871)만 이야기를 나누어 아쉽다고 하였다.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숙공 부인의 병환이 나아서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류휘문은 지난번 泗濱書院에 『密菴先生文集』을 교정하는 모임에 갔다가 먼저 돌아간 것은 아들의 초례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아이들을 데리고 신행을 치르려 하는데 내일 며느리가 자신을 보고자 하여 그때에 맞추려고 한다고 하였다. 執笲의 禮는 신부가 집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행하는 것인데 두 개를 합쳐 하나의 례로 하는 것은 어떤지 상대방의 의사를 물었다.
류휘문은 孤雲 최치원의 『계원필경』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시고를 보니 「潤州慈和寺」 1율은 『詩選』에 들어갔고, 「紅流洞」 1절은 『詩話』에 보이는데, 『계원필경』에는 모두 실리지 않아서, 그 疎漏함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지난번에 篇首 열편의 賀表를 베껴 내었는데, 엉성하여 보기 어려우나 상대방의 요청을 받아서 小冊子를 드리니 또한 봉황의 깃털 하나는 볼 수 있지 않겠냐고 하였다. 최치원은 東方에서 문장이 뛰어난 자로 晩堂의 사람들과도 견줄 만 하다고 하였다. 그의 글이 후세에 널리 전해져야 하는데 主文과 府伯이 보지 못 했다고 하니 그것이 泯滅되지 않고 전해지는 것이 없어 두렵다고 하였다.
발신자는 류휘문(1773~1832)으로 본관은 全州이고,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아버지는 柳萬休(1739~1774)이고 자는 德甫이다.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832년 章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죽은 뒤였다. 저술로는 『好古窩集』이 있고 「冠服考證」, 「家禮攷證」, 「啓蒙攷疑」 등을 실은 별집이 있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