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 10월 11일에 金經進이 柳徽文에게 미리 부탁하였던 記文의 작성을 독촉하고, 상대방의 原詩에 차운한 자신의 〈次東都懷古韻〉와 〈李益之挽詞〉를 보내며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22년 10월 11일, 金經進이 柳徽文에게 미리 부탁하였던 記文의 작성을 독촉하고, 상대방의 原詩에 차운한 자신의 〈次東都懷古韻〉과 〈李益之挽詞〉를 보내며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헤어진 지 여러 날이 되니 여전히 그립다 하고 안부를 물은 다음 자신은 날마다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데 바빠 남에게 전할 만큼 좋은 일이 없다고 하였다. 부탁하였던 記文은 유념하고 있는지 묻고, 작문은 비유하자면 집을 짓는 일과 같아서 목수를 불러 계획을 정하였다면 일이 반 이상 이루어진 것이라며, 상대의 풍부하고 민첩한 재주로 뜻을 정하였다면 솜씨에 따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니 깊은 못에서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東都懷古〉에 대해서는 졸렬한 솜씨로 화운하여 갚는다 하고, 益之 兄에 드리는 만사에는 여덟 가지 슬픔에 하나의 슬픔을 더한다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옛 三良을 슬퍼한 시에 기인하여 王粲이나 曺植과 같은 사람들이 七哀詩의 형식을 창출하였고 杜甫가 칠애시의 형식에 기인하여 八哀詩를 지었으니, 그렇다면 어찌 ‘八’이라는 숫자에 국한되어 그 수를 늘리지 못한다는 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발신인 金經進(1767~1826)은 본관은 安東, 자는 時有, 호는 白室이다. 아버지가 宗燮이니, 川沙 金宗德의 조카이기도 하다. 의성의 사촌에 살았다.
수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