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 1월 3일에 柳聖文이 柳健休에게 자신이 세속의 일에 골몰하느라 직접 찾아 뵙고서 진취를 꾀하지 못하는 사정임을 알리고 몇 가지 의문이 나는 점을 적어 보내니 대답해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
1822년 1월 3일에 柳聖文이 柳健休에게 자신이 세속의 일에 골몰하느라 직접 찾아 뵙고서 진취를 꾀하지 못하는 사정임을 알리고 몇 가지 의문이 나는 점을 적어 보내니 대답해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보낸 서간이다.
피봉에는 閒坪의 경서를 보시는 분에게 高川의 어린 족질이 올린다고 하였는데 閒坪은 세칭 ‘한들’로 류건휴의 거주지이며 高川은 세칭 ‘고랫골’로 류성문이 살았던 곳이다.
먼저 정월이 되니 君子의 도가 자라는 때인데 상대방의 정양 중 체후는 평안하시며 학문의 정력은 더욱 높고 깊어지는지 묻고, 자신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숙환이 더 심해져 날마다 애를 태우는 중이라 새해의 경사스러운 재미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독서와 관련하여서는 본래 게으른 성질에다 곁에 돌보아줄 사우가 없고, 자질구레한 속무에 골몰하여 두서없이 지내므로 끝내는 퇴보만 하고 있는데, 근래 나이 한 살을 더 먹었으나 뱃속은 텅비어 아무것도 터득한 것이 없으니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고 땀이 흐를 정도로 부끄러울 뿐이라 하였다. 변변치 못한 욕심은 상대를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것인데, 형편이 마음 같지가 못하므로 진정을 알리고 정문일침의 충고를 바라는 길이 한 폭 편지를 써서 질문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일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실제로 알고 터득한 것 없이 입으로만 꾸민 공허한 말로 상대의 귀를 어지럽히는 것은 마음에 불안한지라 오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다시 생각하니 한결같이 세월을 보내며 위축되어서 스스로 어른을 찾아뵙는 데서 스스로를 끊어버린다면 끝내는 진취할 길이 없을 것이므로 감히 몇 가지 의문 나는 점을 적어 올린다고 하였다. 또한 명목상 긴요할 것이 전혀 없는 곳에 대하여 범범하게 말하는 것은 초학자로서 크게 경계해야할 점인데도 가르침을 구하려하면서 먼저 금기를 범하였으니 죄송한 마음 간절하다고 하였다.
발신인 柳聖文(1798∼1852)은 본관은 전주, 자는 景學이고, 호는 南棲이다. 생부는 柳趾休로 뒤에 柳穎休에게 양자 갔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는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류장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