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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류휘문(柳徽文)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10+KSM-XF.1821.4717-20180630.0165257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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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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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21
형태사항 크기: 29.3 X 40.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마령 전주류씨 호고와종택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21년 류휘문(柳徽文) 서간(書簡)
1821년 7월 1일에 류휘문이 미상의 수신자에게 상대의 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자 완곡하게 수락하는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상대의 아들이 남의 말만 듣고 멀리서 찾아와 배움을 청하니 사양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두어 달 수작하였는데, 지금 또 편지를 갖고 왔으니 거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편지와 함께 보내준 두 가지 선물은 고맙게 받겠지만 마음은 불안하다고 하였다. 뒷면은 류휘문남한호에게 『중용』의 ‘천명지성’과 『력상수시도』에 관련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써놓은 것인데, 남한호의 부고가 온 이후에 보낸 편지로 보인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승균

상세정보

1821년 7월 1일에 柳徽文이 미상의 수신자에게 상대의 아들이 배움을 청하기 위하여 찾아온 데 대하여 스승의 역할을 장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완곡하게 수락하는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21년 7월 1일, 柳徽文이 某人에게 상대의 아들이 배움을 청하기 위하여 찾아온 데 대하여 스승의 역할을 장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완곡하게 수락하는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상대의 아들이 왔다 간 후에 평소에 교분이 없었던 상대가 매우 가까운 사람인 듯하더니, 5월에 아들이 다시 찾아오면서 편지를 가지고 와 서너 번 읽고 나니 마치 웃는 얼굴을 대한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편지 이후에 달이 거듭 바뀌었는데 정양 중의 건강이 어떤지를 묻고, 자신에 대해서는 보잘것없이 지내는 생활이 남에게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아드님이 남의 말만 곧이듣고 멀리서 찾아와 배움을 청하므로 사양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마지못해 두어 달 수작하였었는데, 올 때 배우라는 명을 받지 못하였다하여 지금 거듭 편지를 가지고 왔으니 그 성의가 가상하다고 하면서도, 성취 여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겸사하였다. 또 편지와 함께 보내준 두 가지 선물은 고맙게 받겠지만 마음에 불안하다고 하였다.
발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뒷면은 본문의 내용과 말미에 쓴 ‘答子皜氏訃至後追送’라는 내용을 보아, 1821년 5월에 柳徽文南漢皓에게 『中庸』의 ‘天命之性’과 『曆象授時圖』에 관련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써놓고, 남한호의 부고가 온 이후에 보낸 편지로 보인다.
먼저 鳴鳳의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난 해 5월에 보낸 편지를 늦가을에 받을 만큼 소식의 두절이 심하였다 하고, 자신도 근심과 병고에 골몰하다가 답장을 하지 못하여 올해도 벌써 5월이 되니 죄송하고 그리운 마음이 하루도 풀린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가뭄과 더위가 연일 혹심한 때에 조섭 중의 건강은 점점 좋아지는지 묻고 자신에 대해서는 며느리가 지난 가을과 겨울 이후 병이 위독하다가 근래에 조금 나아졌고, 봄부터 한들[閒坪]에서 『常變通攷』를 교감하면서 다른 일을 모두 내버려 둔 채 지내느라 지난번의 질문에 대해서도 미처 그 근원을 상고할 겨를이 없어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미안하다고 하였다. 지금 조목에 따라 대답한다며 中庸의 ‘天命之性’의 기질과 관련된 ‘人物之性’의 偏全을 설명하고, 『曆象授時圖』에서 제가의 曆說을 검토하여 周天의 도수가 365와 4분의 1度가 되는 것을 논증하였다.
수신인 南漢皓(1760~1821)는 본관은 宜寧, 자가 子皜이며 호는 誠齋로, 상주 은척면의 杜陵에 살았다. 李象靖鄭宗魯의 문인이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승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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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21년 류휘문(柳徽文) 서간(書簡)

自胤童來往之后。於其
親堂。雖無一日之雅。而頓似聲
息之甚邇。五月中胤君再來。而
珍緘忽墜案上。把翫數四。如奉
色笑。有非誰昔懸空嚮想之
比也。信后。月已屢改。更問
靜體衛護否。仰溯仰溯。徽文。陸陸
塊坐。無足向人道者。而胤君過
聽人言。遠來相訪。要與之商量
句讀。辭謝不獲。强與之酬酢者數月。而
第以來時。不受嚴命相規矣。今
乃奉書重到。其誠極可嘉。而若
其成就與否。豈譾劣所可擔
夯得也。二種伴簡之貺。多感多感。
厚意。只得依受。而旋切不
安耳。餘不備。伏惟
照下。謹謝上狀。
辛巳 七月 一日。柳徽文 拜。
鳴鳳之會不成。而前歲五月辱書。承拜於秋季。已歎其阻闊之極。矧此淟涊憂
病。拜復未遂。而今年又復五月矣。歉竦之私。慕仰之忱。無日不切于中。而近來轉聞。
靜中將攝。大殷失適已累月。區區懸慮。倍切恒品。旱炎比酷。更伏問此際調體
漸向康濟。某。秋冬以來。子婦痰證。幾至不救。日來少可。春後則往坪閒。有禮書勘
挍之役。可費一年工夫。似此度日。萬事依閣。書尺往復。亦復懶廢已久。前日俯詢。亦
不暇考覈其源委。唯是積久稽逋。自絶於金玉之音。極是未安。玆敢逐條備
數。更以求敎焉。中庸天命之性。誠難氣質不得。雖剔取理一邊而言。亦豈無偏全。但
不論偏全。其爲理則同。故子思朱子本旨。但主其同。不及其異。而偏全則自在其中。蓋
人性就四方八面。見得四者之發見。而物性古於父子上。見得有些仁。却於他處。雖無義禮
智之可見。而與此不是別物。其他動植。雖全無仁義禮智之可見。而一物之性。見得。有些
仁有些義。則他物所具之性。與此不是別物。非人則具了四片。而物則具此一片也。曆象
授時圖。少半太。按古人以三分之二爲太半。三分之一爲少半。然此圈。曰半。曰太。曰少。全不精密列
宿起。至於少半太。各有欠剩。而只擧太數言之如此。夫曆家所。則宿度有分毫秒忽之
小數。非少半太三字。所可盡也。今只就此圖上。求其恰滿。則宜其有參差不合矣。蓋歷代
諸曆所言宿度。各自不同。不但槐潭集爲然。當觀漢之三統曆。唐之宣明。宋之開禧。元之授
時。明之大統。淸之時憲。與平壤石本及此圖。無一相似。如角一宿。或作十二度。或十一或十。其餘
皆然。是皆不滿於前代所分。輒復改定故也。又此圖中層。以每月斗建辰次。却作日月所會者
爲太◘。此亦於傳疑及考疑中爲圖。亦不覼縷。(明魄。朔望圖。究其所以爲明魄朔望。則皆係
月之不及日。此圖當以每日不及日十二。)朱子起角之說。以二十八宿之首而言。槐潭起斗之說。以漢
曆冬至日。在斗初而言。然明日過角一度者。有可商量。夫二十八宿之行。卽是天行。豈有天過角
一度之理。或是以六合儀在外。不動之角而言歟。明魄朔望圖。究其所以。有明魄朔望。則皆係
月之不及日。此圖當以每日不及日。十二度十九分度之七積數。而今乃以不及天十三度計之。至二十
七日有奇。已與天會者。與圖名未甚襯著。若其十五下。特書行字。對以標月半也。卄九下。復書
行字。亦由二十七日九百四十分日之三百二分五釐四毫。已與天會。洽周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及滿卄八日。
則行三百七十四度十九分度之六。是於三百六十五度四七五之外。(一度十九分。則四分度之一。卽四分七釐五毫也。)復行九度十九分
度之一分二釐五毫也。(分置三百七十四度減去。三百六十五度。則爲九度。又置六分。減去四分二釐五毫。則爲一分二釐五毫。)二釐五毫。乃四分之三。一◘曰一分
奇。四分之一也。卄九則九度上。又加十三度。爲二十二度。又一分奇。四分之一上。加七分。爲八分四之一也。三十日內。半
日行六度半。就二十二度上。加六度。爲二十八度。又半度爲十九分之九分。半舊半箇七分(卽三分半)。爲十三
分。就上八分四之一上。加此十三分。爲二十一分四之一。卽成一度(十九分爲一度)。餘二分四之一。合前二十八度。爲二十九
度。二分四之一。本日之外。又有九百四十分。分之十九。而此圖爲計。養月與日會。而爲三百六十五
度。四分度之一。己見考疑。且爲執事覰破。故不復贅焉。黃友所著朞策餉。深㶊微。 至於如此。極可欽歎。至於勘正。則不敢承當。而至篇末。略效愚見。然此等處。須使初學易解爲
上。乘除出於不得已也。今此書乘除太深奧。初學似未易領會也。律呂損器暇爲。不詳究。適有昔
年所排相望失。雖不足塵覽。而今漫錄呈。亦望視至焉。斯文運蹇。鄭叔顒。逝去。家 庭之屬望。儕友之倚仗。何如。而今焉已矣。承喩及此。益增哽塞。新寓之書。以錦玉。只因地
名。而亦嫌其太侈。今承誨諭。尤覺其未穩。今截去玉字。但稱錦湖。如何。
答子皜氏。訃至後追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