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7월 4일에 柳健休가 三峴의 문내 인사에게 이전 편지에서 논한 『中庸』의 戒懼愼獨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이견을 제기하고 합치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다시 회답해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15년 7월 4일에 柳健休가 三峴의 문내 인사에게 이전 편지에서 논한 『中庸』의 戒懼愼獨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이견을 제기하고 합치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다시 회답해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三峴은 지금의 예안면 舟津里의 三山으로 全州柳氏 三山派가 세거하는 곳이다.
먼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자신의 집을 방문해 준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초가을에 형제의 생활이 건강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지 물은 다음, 자신은 급류를 타고 내려가는 배처럼 노쇠해 가는 중이라 어느 사공이 그 배에 실은 물건이 상하지 않도록 해줄지 모르겠다며 넌지시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별지에 논의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번거롭게 거론할 필요가 있었겠는가를 반문한 후, 자신의 생각에 온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열 번이라도 반복해 달라고 하였다. 자신이 상대에게 사물을 잘라내 버렸다고 의심을 가지는 것은 추측하여 말함이 지나쳐서가 아니라, 상대가 이미 ‘未發時 睹聞’의 정밀하고 분명함을 ‘外物에 대한 도문’과 동일시하며, ‘不睹不聞의 睹聞’을 ‘戒愼恐懼의 도문’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상대방은 도리어 사물을 잘라버린 적이 없다고 하니, 이에 대하여 자신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며, 어찌 미발시에는 상대적으로 두 개의 보고 들음이었다가 已發時에는 다시 합하여 한 가지의 보고 들음이 되는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이미 사물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하였다가 또 실은 사물에 해당한다고 하니, 이는 끝내 스스로 모순이 되는 듯하다 하고, 만약 이에 대하여 분명히 제시한다면 이치가 닿는 말이 될 터인데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또한 자신으로서는 子思께서 사람들을 요긴하게 가르쳐 주신 곳이 오직 戒懼와 愼獨에 있어 이 두어 구절만을 일생토록 실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상대처럼 보고 들음이 다만 사려일 뿐이라 말하거나, 사물을 함께 포괄하는 것이라 한다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 여기는 것이 된다고 하고, 하물며 이미 선배들의 정론이 있는데도 함부로 의심하고 논란하여 다시 갈등을 일으킨다면 논의에 종착점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이는 병이 깊은 사람이 만금의 좋은 약을 얻고도 탕약을 달이지 않은 채 어지러움을 견디며 약효를 얻기를 바라면서 다만 약 성분의 차고 뜨거움과 약 맛의 달고 쓴 여부를 말할 뿐인 것과 같으니 어찌 실용에 도움이 되겠는가 충고하였다.
발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