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柳健休가 東陵參奉으로 봉직하고 있던 李秉遠에게 먼저 기억하여 편지를 보내준 데 대하여 감사하고 안부를 묻고 전하는 한편 벼슬의 여가에 독서와 함양에 정진하기를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15년 柳健休가 東陵參奉으로 봉직하고 있던 李秉遠에게 먼저 기억하여 편지를 보내준 데 대하여 감사하고 안부를 묻고 전하는 한편 벼슬의 여가에 독서와 함양에 정진하기를 부탁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본폭의 내용으로 보아 별지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먼저 재실에 거처하며 경전을 읽는 생활이 재미가 있다는 데 위안에 된다하고 옛사람이 奉檄하고서 기뻐한 것은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며 상대를 격려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쇠약함과 나태함이 날로 심하여 붕우에게 부끄러움을 끼칠까 두려움으로 지낸다고 하며 겸사하였다.
이단의 邪說이 점점 멋대로 유행하는 세태와 관련하여서는 진실로 근심스럽고 통탄할 일이나 본래 佛學의 영향에 비롯한 것이니 부박한 무리들에게나 유혹이 될 것이라 하고, 우리 영남의 후배들은 선선생(大山 李象靖을 가리키는 말)의 가르침이 몸에 배었으니 서로 이끌어 물에 빠지듯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오히려 이 때문에 사방의 기대가 영남에 있고 영남의 기대가 상대방 같은 학자에게 있으니 더욱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여 가학을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東陵은 예로부터 저자와 조정이 멀리 떨어져 있어 독서와 정양에 좋아 벼슬자리로 가장 좋은 곳이라 하고, 자신이 들은 바로 상대의 부친이 벼슬할 때에 매번 公朝에서 퇴근하면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받아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정진하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 별지에 말한 내용에 대해서는 평이한 서술과 전아한 문장이 자신의 병폐를 구료하는 약이 될 만하였다고 하고 그러나 혹 의견이 다른 부분이 없지 않아 조별로 의견을 말하였으니 살펴보아 달라고 하였다.
발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수신인 李秉遠(1774~1844)의 자는 愼可, 호는 所庵, 본관은 韓山이다. 大山 李象靖의 손자이며 埦의 아들로, 川沙 金宗德을 따라 배워 사서와 정주서에 전심하였고, 1801(純祖 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15년 穆陵參奉을 거쳐 義禁府都事가 되고 淸河와 比安의 현감을 지냈다.
내용에서 언급한 선대부 존장이란 李埦(1740~1789)을 가리키는 말로, 자는 치도(致道), 호는 간암(艮巖)이다. 1774년 문과에 급제하여 1777년(정조 1) 厚陵別檢에 임명되고, 1786년에 6품에 승진하여 지평이 되었으며, 1789년에는 정조가 이상정의 학덕을 추념하여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하였다. 그 뒤 서학 교수에 임명되었으며 현릉과 융릉을 조성할 때 왕을 호종하면서 노숙하다가 병이 들어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간암집 9권 5책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