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6월 15일에 柳徽文이 한들[大坪]의 族叔 柳健休, 韶休 형제에게 상대의 저술인 『溪湖學的』은 아직 다 읽지 못하였으며, 『儀禮經傳通解』와 『朱文公家禮』의 내용에 저작의 시기와 관련한 차이가 있다고 한 상대의 견해에 동의를 표하고, 『中庸』의 ‘不睹不聞’ 설에 대하여 다시 질의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14년 6월 15일, 柳徽文이 한들[大坪]의 族叔 柳健休, 韶休 형제에게 상대의 저술인 『溪湖學的』은 아직 다 읽지 못하였으며, 『儀禮經傳通解』와 『朱文公家禮』의 내용에 저작의 시기와 관련한 차이가 있다고 한 상대의 견해에 동의를 표하고, 『中庸』의 ‘不睹不聞’ 설에 대하여 다시 질의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초봄 무렵 받은 편지의 뜻이 정중하여 세 번 거듭 읽고서 옷깃을 여미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참혹한 상사 때문에 골몰하느라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으므로 답장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지난번 편지로 『川沙集』을 공부하고 있음을 알았었는데 湖門[大山 李象靖을 지칭하는 말]에서 학자를 위하여 힘껏 표창하고 권면하였던 것이 ‘居處恭·執事敬’의 공경 공부였다는 말을 듣고서 전현의 지결이 유래가 있으며 상대가 그것을 잘 읽었음에 깊이 경탄한다고 하였다.
또 『溪湖學的』은 토론하려고 하여 한가한 시간에 한 번 훑어보았으나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교정 보충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하고, ‘居寢은 廟制와 같다.’는 것은 『儀禮』에 보이는 말로, 『朱子大全』의 〈儀禮釋宮〉 편이 모두 『의례』 중에서 채택하였는데, 『儀禮經傳通解』는 朱子 만년의 편서로 『朱文公家禮』보다 30여 년 나중에 저술한 것이므로 『가례』에서는 미처 개정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고 한 상대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다고 하였다. 또 ‘부도불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깨우쳐 준 뜻이 간곡하고 지극하지만 아직도 석연하지 못한 곳이 있어서 일일이 진술하여 가르침을 구한다고 하였다.
발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유장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