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3월 24일, 李秉秀가 柳徽文에게 從叔父의 초상을 알리고, 장마로 불어난 물이 줄고 전염병 기운이 걷힌 후 딸을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딸은 柳徽文의 며느리인 固城李氏이다.
먼저 보내준 편지를 받고 형제분의 기거가 좋음을 알게 되니 매우 위로가 된다 하고 다만 부인과 아들의 병환에 염려가 적지 않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건강하니 다행이지만, 집안의 불행으로 법흥에 우거하고 있던 종숙부의 상을 당하니 슬픔을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하였다.
딸이 떠나는 일은 한 번 정지하고 두 번 정지하는 동안 공연히 심부름꾼만 내왕하게 하였다고 하고, 지금은 초상의 衣帶를 차리는 중이고 마침 장마로 물이 분 데다가 몇 군데 다녀올 일이 있어 곧바로 알리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자신이 민첩하지 못한 데 따른 죄인데도 따지지 않고 곡진히 거두어 주는 말씀을 해주니 매우 감사하다고 하였다. 물길이 순탄해지고 상대 마을의 병기운도 걷히기를 기다려 말씀하신 것처럼 천천히 도모하겠다고 하고, 다음달 초에 들르겠다는 말에 미리부터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고 하였다.
발신인 李秉秀(1770~1834)는 본관은 固城, 자는 象文, 호는 蠖圃이다. 아버지는 周世로 안동 마뜰[午郊]에 살았다. 딸이 柳致喬에게 시집갔으므로 류휘문과는 사돈 관계가 된다.
수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뒷면은 ○○년 ○월일에 柳徽文이 족질 柳致學의 중용과 관련한 문목에 대하여 대답한 내용의 답서이다.
중용에서 먼저 ‘一理’를 말하고 중간에 ‘萬事’로 확산하였다가 마지막에 다시 ‘一理’로 통합하는 전개를 다만 ‘誠’이라는 한 글자로 보는 것이 어떤가에 대하여, ‘誠’이 중용의 시종을 관통하는 핵심이지만 ‘一理’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이며, ‘일리’가 ‘만사’로 확산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를 보아야 할 것이요, 要綱만 들고 題目만 들어 논지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다.
또 처음에는 ‘中和’를 말하고 다음에는 ‘中庸’을 말하였으며, 또 ‘知仁勇’을 말하고, 중간에 또 ‘費隱’을 말한 다음, 9장에서 ‘三達德’, ‘天道’와 ‘人道’를 말하니, 관통하여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첫 장에서 ‘중화’를 말하고 2장에서 또 ‘중용’을 말한 것은 지와 행에 과불급이 없기 때문이고, 그 다음에 지인용을 말한 것은, ‘知’는 知에 과불급이 없는 것이요, ‘仁’은 행에 과불급이 없는 것이며, ‘勇’은 지와 행에 과불급이 없도록 하는 것인데, ‘中’이 ‘道’가 됨은 그것을 가지지 않은 물건이 없어서 넓고도 은미하므로 ‘費隱’을 말하여 그것을 거듭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런 광범하고도 은미한 도의 실재를 힘쓰지 않고도 행하는 것은 ‘聖人의 仁’이요,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은 ‘聖人의 知’인데 비해 ‘擇善’은 ‘賢人의 知’이고 ‘固執’은 ‘현인의 仁’이 되므로 그 다음에 ‘天道’와 ‘人道’를 말한 것이니, 여기서 혈맥이 시종 관통함을 알 수 있다고 답하는 등 네 조목의 질문에 대하여 답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