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1월 11일에 李秉秀가 안부를 물으며 西北의 민란으로 어수선한 때에 딸이 媤家로 가는 것을 늦추어 주기를 부탁하기 위해 柳徽文에게 쓴 편지
1812년 1월 11일에 李秉秀(1770~1834)가 안부를 물으며 西北의 민란으로 어수선한 때에 딸이 媤家로 가는 것을 늦추어 주기를 부탁하기 위해 柳徽文(1773~1832)에게 쓴 편지이다.
우선 자신과 가족들의 안부가 편안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어서 洪景來의 난에 상황에 대해여 이야기 하고 있다. 西北의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서 수령을 살해하고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데, 민란은 서울의 군대가 진압하면 근방 가라앉을 것이나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동요하여 흩어지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하였다. 집 앞에 큰길에는 날마다 피난하는 행렬이 있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때에 딸을 媤家로 돌려보내라는 명은 당장 실행하기 곤란하며 며칠 뒤에 직접 대면할 것을 부탁하였다.
발신자인 이병수는 본관이 固城, 자는 象文, 호는 蠖圃이다. 생부는 李周世이고, 李宗軾의 양자가 되었다. 안동에 거주하며 향리에 있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수신자인 류휘문은 본관이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부는 柳萬休이고 안동에 거주하였다. 東巖 柳長源, 損齋 南漢朝, 立齋 鄭宗魯의 문인이다. 학행이 뛰어났고, 1830년에 觀察使와 暗行御史의 천거로 厚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2년 후에 뒤에 長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다. 家禮考訂․啓蒙攷異․好古窩集․周易經典通篇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류휘문의 아들인 柳致喬(1790~1862)가 이병수의 長女와 혼인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 12월 18일에 반란군이 嘉山을 공격한 것을 시작되어, 10일 만에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남창, 용천 등 함락시켰다. 亂軍은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官軍의 반격으로 12월 29일에 박천에서 패배하고, 북진군은 1812년 1월 10일에 곽산에서 패배하여 1월 17일에는 정주성을 제외한 모든 거점을 상실하였다. 이후 4월 19일에 농성하던 정주성이 함락됨으로서 난은 실패하였다. 편지를 쓰는 시점인 1월 11일은 난이 확대되는 것은 멈추었으나, 관군이 결정적인 승리는 아직 거두지 못한 시점이었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