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11월 24일 柳栻이 柳徽文에게 『太極圖』의 해석에 대한 상대의 의론에 이견을 제기하고 아울러 子皓에게 보낸 『大學』에 관한 여러 說에서 누락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11년 11월 24일 柳栻이 柳徽文에게 『太極圖』의 해석에 대한 상대의 의론에 이견을 제기하고 아울러 子皓에게 보낸 『大學』에 관한 여러 說에서 누락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초가을에 백씨 존장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내용이 안부 인사뿐만이 아니어서 고맙고 부끄러웠다 하고, 그 사이 한두 군데 반복하여 생각한 곳이 있었으면서도 인편이 없어 전하지 못하였는데 앞으로 소식이 매우 잦을 것이니 이때까지의 논의를 합병하여 생각함으로써 논의가 귀일되기를 바란다고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이 섣달의 추위에 정양하는 형제분의 건강과 생활이 평안하며 독서에 새 재미가 있는지 묻고 자신은 병으로 칩거하는 중에 노둔한 아이들 두어 명과 글을 읽고 있을 뿐 달리 전할 말이 없다고 근황을 전하였다.
心性과 理氣의 설에 대해서는 이곳 붕우도 이견이 없지 않으므로 자신의 의론이 틀렸음을 알았다 하고, 그러나 『태극도』의 上圈을 순수한 ‘理’라 하고 제2도를 ‘理氣를 겸한 것’이라 한 상대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자신의 견해로는 상권은 朱子가 陰陽圈에서 위로 도출하여 ‘섞이지 않는다.[不雜]’는 뜻을 보인 것이니, 실상 음양권 속의 태극이지 兩儀를 가진 태극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 「則圖畫卦說[河圖」를 본 떠 괘를 그은 것에 대한 설은 뜻이 미세하고 위치가 정당하니, 진실로 전시대 학자들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라 하였다. 그 가운데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견해가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라 하고, 훗날 대면하여 의견을 다 제시하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또 子皓에게 보낸 편지 중의 대학제설은 자신도 평소에 의문을 가진 곳이었다 하고, 지금 보니 근거를 넓게 제시하고 정밀하게 변론하였으나, 枕澗亭 答書에 대해서는 고쳐 평론한 곳이 없었다며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점점 쇠약해져 가니 붕우와 의론을 나눌 수가 없게 되었다 하고, 이 몇 가지 조항은 사실 자신에게서 발단된 문제이므로 다시 자세하게 말하였는데, 아마도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니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내용에서 대학제설과 관련하여 언급한 子皓는 南漢皓(1760~1821)의 자이다. 본관은 宜寧, 호는 誠齋로 상주 杜陵에 살았다. 李象靖과 鄭宗魯의 문인이다.
발신인 柳栻(1755~1822)은 본관은 진주, 자는 敬甫, 호는 近窩이다. 아버지는 承源이다. 상주에 살았다. 정종로를 사사하였고, 1790년 증광시 진사에 입격하였다. 문집 『近窩集』이 있다.
수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