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 12월 19일에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性’과 ‘道’, ‘理’와 ‘形氣’의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설명한 앞뒤 두 번의 편지 내용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08년 12월 19일,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性’과 ‘道’, ‘理’와 ‘形氣’의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설명한 앞뒤 두 번의 편지 내용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피봉에 子强 형에게 올린다 하였는데 자강은 柳健休의 자이다.
서두에서 지난번 편지에서 말한 것은 핵심을 짚은 정밀한 내용으로 자신의 늙은 정력으로 쉽게 엿볼 수 없는 것이어서 마음으로 생각할 뿐 답장을 하지 못하였는데, 그 사이에 또 편지를 보내어 성의를 표한 것이 더욱 간절하니 읽고서 더욱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였다. 이어서 섣달의 추위에 독서하는 근황은 평안한지를 묻고 자신에 대해서는 추위를 맞아 병이 더욱 고통스러워 근래에는 침과 약을 쓰는 데 심력을 허비하고 있다며 가소롭고 한탄스럽게 여기는 심경을 전하였다.
본론으로 앞뒤 두 편지에서 말한 ‘性’과 ‘道’에 관한 설명을 통합해서 보니, 앞 편지에서는 성이나 도를 理로써 말하여, 大意에서 옳은 것이었으나, 나중 편지에서는 성이 도와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다고 의심한 부분과 처음 태어날 때 품부되기도 하고 태어난 후에 부여되기도 한다고 한 말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성과 도가 ‘形氣’를 범하지 않는다는 본래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반문하며 부정하는 의견을 보였다. 그 근거로 朱子의 "理로써 말하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며, 氣로써 말하면 편벽되기도 하고 온전하기도 하다."고 한 말을 들고, 이것이 과연 처음 태어날 때 품부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겠는가 하며, 그것이 아니라 형기 위에서 떨어지고 합한다는 데 나아가 말하였으므로 온전하기도 하고 온전하지 않기도 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中庸』에서 논한 性과 道는 위로 天命에서부터 아래로 일용사물에 이르기까지, 근본에서 주간에 이르기까지, 주간에서 지엽에 이르기까지 오직 理로만 말한 것이니 곧 이른바 ‘形氣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까닭’이라 하였다. 상대의 나중 편지에서 말한 바에는 혹 출입이 있어 스스로 모순이 된다 하고, 잘못된 견해로 굽은 것을 펴려다가 반대쪽으로 굽히는 것일 수 있으니, 다시 반성하여 온당함을 구하기를 천만 바란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말이 지나친 것 같으나, 이것은 儒家 本原의 宗旨로서 털끝만치라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니 허물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발신인 南漢朝(1744∼1809)는 본관은 宜寧이며 아버지는 必容이다. 자는 宗伯, 호는 損齋이다.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9세에 고아가 되어 외숙인 金鎭東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나중에 李象靖을 사사하여 경사자집을 읽고 居敬窮理의 학문에 힘썼다. 여러 번 道伯과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 『손재문집』 15권이 있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