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 5월 27일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상호 안부를 전하고 학문상 견해의 同異處에 대하여 토론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08년 5월 27일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상호 안부를 전하고 학문상 견해의 同異處에 대하여 토론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피봉의 수신자 란에 쓴 子强은 柳健休의 자이다.
먼저 4월 14일에 받은 편지에 대하여 병을 앓느라 답장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다시 편지를 받으니 정성스러운 뜻이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자신의 병으로 인한 혼미에다 인편까지 드물어서 제 때에 답장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맺히어서 마치 먹은 음식이 소화가 되지 않은 듯하다고 말머리를 열었다. 이어서 독서하는 기거에 신의 가호가 있는지 묻고 자신은 濕氣로 인한 風病이 고질이 되어 두렵게 지내는데 가장 심한 것은 붓을 잡지 못하고 말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 끝내 허깨비처럼 지내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자네가 인용한 許渤의 일은 내가 그대의 뜻을 오인하여 중대한 오류를 불렀는데, 다행히 일깨워준 뜻에 힘입어 끝내 미혹되는 데서는 벗어났으니 큰 은혜를 입었다."라고 한 후, "‘手足의 운동이나 耳目의 견문은 한 가지 의미’라 한 선현의 말씀은 착오가 없는 전제인데, 지난 편지의 하단에서 초년설과 만년설의 차이로 본 것은 석연하지 않다.’고 하며 다시 연구하여 알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에 편중된 곳이 있어 막 처음부터 끝까지 점검하여 교정하려 하고 있지만 병을 앓는 중의 정력으로 잘 분간할 수가 없다 하고, 이번에 편지에서 말한 내용은 그 해설만을 전공하려는 것이니, 도박에 金을 걺으로써 한 쪽에 빠지는 미혹이 되는 것은 아닐지 경계하였다. 끝으로 정신이 모자라 남의 손을 빌려 간신히 쓰느라 대략 언급한다는 인사로 마무리하였다.
발신인 南漢朝(1744∼1809)는 본관이 宜寧이며 아버지는 必容이다. 자는 宗伯, 호는 損齋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하여 외숙인 金鎭東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나중에 大山 李象靖을 사사하고 여러 서적들을 탐독, 居敬窮理에 힘썼다. 여러 번 道伯과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 『손재문집』 15권이 있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