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 12월 25일에 상중의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종부의 초상을 입은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앞서 보내온 문목에 대략 답해 보낸다는 것과 상대의 지나친 공대가 부담스럽다는 자신의 심경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07년 12월 25일에 상중의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종부의 초상을 입은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앞서 보내온 문목에 대략 답해 보낸다는 것과 상대의 지나친 공대가 부담스럽다는 자신의 심경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피봉에 수신자로 밝힌 子强은 柳健休의 자이다.
먼저 다시 보내준 긴 내용의 편지에 별지를 겸하여 보내준 성의에 감복한다 하고 마땅히 답장을 올려야 하였지만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 매번 인편을 헛되이 놓치게 되니 스스로 자책할 따름이라고 말머리를 연 다음 상대의 안부를 묻고 날로 독서의 즐거움을 더하고 있을 것이니 하례한다고 하였다. 자신은 집안의 불행으로 宗婦의 상을 당하였는데 남겨진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에 심경이 비참하고 처량한 데다 갑자기 천연두가 발발하는 바람에 간략하게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어 몹시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보내준 몇 조항의 질문에는 정신이 산란하여 대략 답해 보낸다고 하며 다만 자신을 추켜서 하는 말은 어찌 그리도 번거롭게 반복하느냐고 물었다. 자신을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은 무실역행의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서로 강구하여 보탬이 되게 하려는 일은 처음부터 이러한 허례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고, 다시 이런 일을 반복하면 비록 서로 도움을 주는 처지라 하더라도 감히 받을 수가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인편이 갑자기 떠난다고 하는데, 옆에 글을 대신 쓸 사람이 없어 어두운 눈을 비비면서 간신히 쓰느라 공경의 예를 갖추지 못한다고 하며, 송구영신의 때에 복이 많기를 비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발신인 南漢朝(1744∼1809)는 본관이 宜寧이며 아버지는 必容이다. 자는 宗伯, 호는 損齋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하여 외숙인 金鎭東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나중에 大山 李象靖을 사사하여 여러 서적들을 탐독, 居敬窮理에 힘썼다. 여러 번 道伯과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 『손재문집』 15권이 있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가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