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 11월 2일에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보내준 편지에 감사하며 안부를 묻고 학문에 치력하여 학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당부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07년 11월 2일에 南漢朝가 柳健休에게 보내준 편지에 감사하며 안부를 묻고 학문에 치력하여 학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당부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자신에게 왕래하는 華宗[이름이나 자에 ‘華’자가 들어가는 자신의 宗人에 대한 지칭] 인편으로 상대의 공부하는 근황에 대하여 전해 듣고 흠모하면서도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 못하여 자신의 不敏에 대하여 탄식하던 중이라 하였다. 또 의외의 편지를 받으니 기억해 주시는 후의에 감사하다고 하며 다만 상대가 자신에게 지나친 공손을 표하여 마치 후배처럼 처신한 데 대하여 부끄럽고 두려워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겨울 추위가 이미 매워진 때에 상대방의 건강은 어떠한지 안부를 물은 다음 독서에 성취가 있을 터인데 자신이 직접 만나서 그 영향을 받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자신은 날로 노쇠가 심해져 출입을 끊고 조섭하는 중이지만 점점 게을러지는 바람에 사람 축에 끼지 못하는 터인데 상대가 과도히 추중을 아끼지 않으니 당대 군자들에게 비웃음을 살 뿐 아니라 상대의 실상에 힘쓰는 공부에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후로는 이러한 허례를 낭비하지 말기를 당부하였다. 景范의 죽음은 학자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기는 일이라 하고 상대가 쓴 그의 유사를 보니 그 독실한 위기의 공부가 세속의 학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라 하고 사는 곳이 멀어서 미처 알고 지내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대방은 이미 그와 학문상의 교류를 통하여 깊이 도움을 받았을 것이니 더욱 절차탁마하여 평소에 서로 면려하던 뜻에 부응하는 것이 切偲의 의리일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보내준 問目은 독서와 사색을 거친 뒤에 나온 질문이라는 것을 알 만하니 경탄을 그치지 못하겠다 하고, 용무에 시달리느라 간략하게 대답하니 이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일이 다시 알려달라고 하며 편지를 맺었다.
발신인 南漢朝(1744∼1809)는 본관은 宜寧이며 아버지는 必容이다. 자는 宗伯, 호는 損齋이다.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9세에 고아가 되어 외숙인 金鎭東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나중에 李象靖을 사사하여 경사자집을 읽고 居敬窮理의 학문에 힘썼다. 여러 번 道伯과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 『손재문집』 15권이 있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