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3월 아침에 柳徽文이 아들 柳致喬에게 처가에 있는 동안 행동을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臨淸閣에서 『琴譜』를 빌려 올 것, 中平에 가게 되면 약재를 채취하여 손질해 올 것 등을 지시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1805년 3월 아침에 柳徽文이 아들 柳致喬에게 처가에 있는 동안 행동을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臨淸閣에서 『琴譜』를 빌려 올 것, 中平에 가게 되면 약재를 채취하여 손질해 올 것 등을 지시하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간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 동안 잘 지내는지, 마뜰[午郊] 및 塔洞, 平里 등의 여러분도 모두 건강한지 염려가 적지 않다고 하였다. 자신은 어머님의 환후가 이달 초부터 한층 심해진 데다 종기가 터져 기운이 빠지니 매우 초조하고 애가 탄다 하였다. 이번 기별을 듣고서도 느긋이 외지에 있을 수는 없지만 병구완은 상대가 도울 필요가 없고, 또 상대의 장인이 출타하여 아직 돌아오기 전이라 하니, 일을 섣불리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중평에 인사도 빠뜨릴 수 없으니, 주인가의 형편을 보아가며 잘 헤아려 행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상대가 그 곳에 있으면서 농담을 일삼아 또 실수를 하거나 남을 이기려하는 병폐가 많다고 들었다고 하며, 이는 모두 옛 사람이 거만함을 멀리하고 신의를 가까이하라고 한 말씀을 생각하지 않아서라며 경계하고, 『詩傳』은 무슨 편을 읽고 있는지 묻고 돌아온 후에는 한 차례 배송할 생각하라고 하였다.
또 상대가 떠날 때 臨淸閣의 『琴譜[거문고악보]』를 빌려오도록 시켰는데, 지금은 우환 때문에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고, 그러나 달리 인편이 생기기 쉽지 않으니 그 젊은 주인을 통해 빌리되 반드시 빌리려 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또 혹 중평에 가게 되면 蒼朮과 地骨皮 등의 약재를 채취해오라며 손질하는 방법을 지시하고, 이 일 때문에 일부러 갈 것은 없다 하였다. 마지막으로 海底의 金令과 蔡承旨가 모두 풀려났다는 소식을 알렸는데, 김령은 金翰東이며, 채승지는 蔡弘遠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김한동은 歙谷, 채홍원은 穩城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3월 22일에 방환되었다.
편지 내용으로 볼 때 이 때 류치교는 安東 마뜰의 처가에 가 있었는데, 출타하여 아직 돌아오기 전이라고 한 장인은 李秉秀(1770~1834)이다.
발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수신인 류치교(1790~1862)는 자가 叔久, 호는 守齋이다. 류휘문의 長子이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