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11월 23일에 黃夔漢이 柳健休에게 자신이 아들을 잃었다 하여 위로의 편지를 보내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답장 편지
1804년 11월 23일, 黃夔漢이 柳健休에게 자신이 아들을 잃었다 하여 위로의 편지를 보내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 답장 편지이다.
먼저 자신이 아들을 잃은 데 대하여 위로의 편지를 보내 주었는데, 편지의 말이 정중하였다 하고, 인척으로서의 두터운 정의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며 감사하였다. 자신은 하나뿐인 아들을 보전하지 못하였는데, 재주가 있고 없고를 논외로 하고, 이는 자신이 박덕하였기 때문이니, 지인 친구의 조문을 받을 때마다 슬프고 부끄러운 마음만 간절하다고 하였다. 이어서 편지를 통하여 한겨울 날씨에 상대 형제가 건강하며 질부 또한 보호 아래 잘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되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하고, 자신의 주변에 대해서는 자신의 슬픔쯤이야 남의 위로를 받을 일에 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늙으신 부모가 정에 약하여 그 손자의 죽음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병환이 점점 깊어지고 있으니 죄스럽고 안타깝다고 하였다.
또 자신은 상대방의 德器가 제배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에 대하여 孟博 형을 통하여 들은 적이 있었고 혼인을 맺어 사돈지간이 된 이후로는 조카에게서 인품의 대개를 듣고 있어 더욱 흠모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번에 이렇게 먼저 조문 편지를 보내주니, 비록 일반적인 예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귀한 보배를 얻은 것에 비할 것이 아니라 하고, 어서 만나 뵙고 좋은 말씀을 듣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편지에 일부러 근황을 언급한 姪婦란 전주 류씨의 딸로서 자신의 조카에게 시집온 사람으로 이 때 친정으로 근친 가있는 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상대의 덕기에 대하여 전문한 적이 있다고 한 孟博이라는 사람은 柳約文(I745~1819)을 가리킨다. 맹박은 그의 字이고, 호는 龜峀이다. 류건휴의 족질이며 동암 柳長源의 손자이다.
발신인 황기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영주에 살았던 조선 후기의 학자 貞窩 黃龍漢(1744~1818)의 문집인 『貞窩集』에 族弟로 언급한 곳이 보이니 본관이 창원일 것이다. 또 1792년(정조 16)의, 사도세자 신원을 청한 영남 만인소에 幼學으로 황용한과 함께 연명한 것이 보이고, 1816년(순조 16) 4월 16일의 崇禎處士 洪宇定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한 상소에도 유생의 일원으로 연명하였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활동한 영주 지역의 유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