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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류건휴(柳健休)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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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류건휴, 황학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01
형태사항 크기: 32.5 X 43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수곡 전주류씨 수곡파 대야고택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01년 류건휴(柳健休) 서간(書簡)
류건휴(柳健休)황학(黃㶅)에게 보낸 편지로 명예나 부귀를 위한 공부가 아닌 위기지학의 학문을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아울러 김종덕(金宗德)의 문하에서 공부했을 때 들은 학문상의 견해를 구하는 내용이다.
1차 작성자 : 김상년

상세정보

1801년 12월 2일에 柳健休가 靑雲驛吏 출신인 黃㶅이 보낸 편지에 대하여 군자는 위기지학을 하는 사람이니 자신을 비하할 것이 아니라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기를 당부하고 학문상의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답장한 편지
1801년 12월 2일에 柳健休가 靑雲驛吏 출신인 黃㶅이 보낸 편지에 대하여 군자는 위기지학을 하는 사람이니 자신을 비하할 것이 아니라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기를 당부하고 학문상의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답장한 편지이다.
먼저 지난 봄에 보내 준 편지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좋은 내용이라 지금까지 답장을 주저하였었는데 그동안도 학문에 매진하는 재미가 진승한지를 물었다. 또 상대방은 先生 長者들과 사귄 사람으로서 입지가 굳세지 못하여 세속의 일에 전전하느라 범상한 사람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자신에게 장점을 취할 만한 것이 있을까하여 조언을 구한 것은 상대를 잘못 본 일이라고 겸사하고, 그러나 타산지석도 오히려 옥을 다듬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니 모자라는 견해이더라도 채택해 달라고 하였다.
상대가 지난 편지에서 누누이 거듭한 말로 볼 때 향학심은 지극히 정성스러우면서도 스스로의 지위가 낮다는 것을 심중에서 꺼리는 듯한 자세를 면치 못하였다고 하고, 군자의 학문은 위기지학이니 아무리 지위가 천한 종복일지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는 모두 그 직분에 마땅한 일을 하는 데 있는 것이니, 명예나 부귀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므로 명예나 부귀의 가망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지 않고 근면히 하는 것이라 충고하였다. 한편 관리가 세상에 있게 된 이후로 지위가 낮은 자는 독서와 행실에 힘써도 사대부의 대열에 낄 수 없음을 알므로 독서를 한 자는 가혹한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니 통탄할 일인데, 상대방은 오직 이러한 세류에서 벗어나 분연히 도를 행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존경스러운 점이라 하였다.
또한 일찍이 川沙(金宗德의 호)의 문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하니 그 때 들은 학문 상의 견해 한 두 가지를 써서 보여 달라 하고, 요사이에는 府南(청송 부남에 사는 어떤 사람)에 자주 왕래한다는데 틀림없이 들을 만한 말이 있을 것이지만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는 말을 첨부하였다.
발신인 柳健休(1768∼1834)의 본관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이다. 경상북도 安東에 살았다. 초년에 柳長源에게 배우고, 柳長源 사후 損齋 南漢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는데,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선현의 문집 63종을 참조하여 『東儒四書解集評』을 쓰고, 또 퇴계와 대산의 성리학이론 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近思錄』의 체제를 따라 『溪湖學的』을 썼다. 문집으로 『大埜集』 10권 5책이 전한다.
수신인 黃㶅(1758-1804)은 자가 學中이고 호는 晩翠軒이다. 그 선조는 平海人(평해인)으로 청송의 靑雲驛에 들어와 世襲吏役을 지냈는데, 아버지는 黃錫文이다. 일찍이 厚庵 權濂의 문하에 나아가 처음엔 과거공부를 익히다 그것이 지엽말단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성리서를 배우기를 청하자 선생이 기특하게 여기며 이끌어 주었다. 후암이 타계하자 川沙 金宗德에게 나아가 대학과 논어 등을 배우고 學問思辨에 애썼다. 또한 뛰어난 스승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달려가 배움을 청하고 배움을 성취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804년(순조 4) 9월 22일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해 10월 16일 장사를 지냈는데 도내의 명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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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01년 류건휴(柳健休) 서간(書簡)

靑雲 學案 回納。
大坪 謝狀。 謹封。
答黃㶅
春間惠牋。至今披玩。有令人起敬處。有令人
惶愧處。所以遲回而迄未奉復。然感暢則深矣。
比日寒威峭獰。卽問
學味益珍。日有征萬否。瞻溯無已。健。立志不强。奪
於名利之工。困於庸鎖之務。七顚八倒。無足以比
數於制裡庸人。而左右乃以其嘗從先生長者
之後。意者或有一長可取。而欲與之資其警益。
意則盛矣。而所以施之者。非其人也。然他山之石。猶
足以攻玉之資。區區不逮之見。或可以備賢
者之採擇耶。示諭縷縷。足見向學不倦
之意。而措辭之間。似未免有些介介於地位之卑
下。只此一念之萌。雖若無甚害事。而遂成根
株。不能當下斫倒。則到底作突怪也。是不
可以不深戒也。竊嘗聞之。君子之學。爲己而已。吾
之所以稟於天而具於心者。初無貴賤之殊。則雖
在泣奴之賤。而治心養性之工。皆其職分之所當
爲也。非爲有名而爲之。故不爲無名而撤。非爲求貴
而爲之。故不爲不貴而止。俛焉孶孶。如恐不及者。
不過爲吾之所當爲而已。世間一切毁譽榮辱。有何加損
於我哉。抑因此而有至盛焉。自我東方。官人以世以
來。地位卑下者。自知雖讀書飭行。不得齒數於士大
夫之林。故自胥吏以下。則絶無以讀書爲名者矣。胥吏
名爲讀書者。又不過籍此而爲酷吏之鷹犬。生民之蟊
蠹而已。良可歎也。於是而左右。乃能超乎流俗之
中。而慨然以作道爲
心。豈非稀貴而可敬
也哉。曾聞嘗及
川沙門下。必有所聞。
草以一二示及如何。
又聞源源相從於
府南。上下討論之際。
亦必有可聞之言。恨
未得致身其間而與
聞之也。餘。債草不宣。
照亮。
辛酉 臈月 初二日。柳健休 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