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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류벙휴(柳範休)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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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류범휴, 남한조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97
형태사항 크기: 21.6 X 28.2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수곡 전주류씨 정재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97년 류벙휴(柳範休) 서간(書簡)
1797년 12월 29일에 이종제 류범휴남한조에게 안부를 물으며 관직에 제수된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이다. 지난 날 함께 공부했으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또 학문을 논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을 탄식하였다. 이어 며칠 전에 조모의 대상을 지냈는데, 임금의 특지로 벼슬에 제수되어 사직하지 못하고 이에 외숙의 모임에도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종수가 세상을 떠나 영남사림의 바람이 수신자게에 돌아간다고 하였다.
『全州柳氏大同譜』,
1차 작성자 : 이재현

상세정보

1797년 12월 29일에 姨從弟 柳範休가 안부를 물으며 관직에 제수된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위해 南漢朝에게 쓴 편지
1797년 12월 29일에 姨從弟 柳範休(1744~1823)가 안부를 물으며 관직에 제수된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위해 南漢朝(1744~1809)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는 지난 날 함께 공부했으나 겨울이 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만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또 이어서 수신자의 안부를 묻고 학문을 논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을 탄식하였다. 다음으로 자신의 근황을 전하면서 며칠 전 조모의 大祥을 치뤘다고 하였다. 이어 관직에서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特旨로 제수된 것이라 사양하지 못하고 謝恩肅拜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때문에 歲後에 있을 예정인 外叔의 모임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后山어른이 세상을 떠나 嶺南士林의 바람이 수신자에게 돌아가게 되니, 학문에 더욱 힘써 달라고 당부하였다.
발신자인 류범휴는 본관이 全州, 자는 天瑞, 호는 壺谷이다. 부는 柳道源이고 조부는 柳升鉉 으로 안동 水谷에 거주하였다. 東巖 柳長源․ 大山 李象靖의 문인으로 1780년에 生員이 되었다. 蔡濟恭李湄鄭宗魯南漢朝 등과 교유하였고, 泗濱書院 등지에서 강의를 하였다. 禁府都事司僕寺主簿松禾縣監安邊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1823년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저서로 󰡔壺谷集󰡕이 등이 전한다. 편지에서 류범휴가 받은 관직은 안변부사이며,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류범휴1797년 12월 20일에 안변부사로 제수되었다. 류범휴의 아들인 柳魯文이 쓴 『家世雜記』에 의하면 류범휴는 이 소식을 12월 26일에 들었다.
내용 중 ‘伯母終祥’은 류범휴의 조모인 光山金氏의 大祥을 말한다. 그녀는 金漢璧의 딸로 1795년(乙卯) 12월 27일에 졸하였다. ‘渭陽’은 『詩經』「渭陽」편에 춘추 시대 秦康公이 외숙인 晉文公을 이미 죽은 모친을 그리워하며 위양에서 전송하며, ‘내 외삼촌을 전송하려고 위양에 이르렀노라.[我送舅氏, 曰至渭陽.]’라고 노래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류범휴의 모는 안동 海底(현재는 봉화에 소재)의 義城金氏 丹砂 金景溫(1692~1734)의 딸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南漢朝(1744~1809)로 추측된다. 김경온은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金翼東((1716~1780)․素巖 金鎭東(1727~1807)․金斗東이고, 딸은 각각 南必容류도원李東殷金一鍊과 혼인하였다. 류범휴가 姨從弟라 칭하였고, 『家世雜記』에 나타난 ‘隱嶺南叔’이라는 표현과 편지 피봉에 ‘隱嶺’이라고 쓴 것을 보아 수신자는 南必容의 아들 중 하나로 보인다. 남필용에게는 南漢朝南漢宗 두 아들이 있는데, 류범휴의 연배와 ‘우리 당의 바람이 존자에게 돌아간다.[吾黨之望有歸]’ 등의 표현으로 볼 때 남한조가 수신자로 추측된다.
남한조의 본관은 宜寧, 자는 宗伯, 호는 損齋이다. 상주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인 김진동에게 수학하였다고 한다. 중년에는 이상정의 문인이 되었다. 후에 문경의 선유동에 玉霞亭을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여러 번 暗行御史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損齋集󰡕이 전한다. ‘后山丈’은 李宗洙(1722~1797)이다. 이종수의 본관은 眞城, 자는 學甫, 호는 后山이다. 부는 李起三으로 안동 송리에 거주하였으며 이상정의 문인이다. 40여 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爲己之學에만 힘쓸 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저서로 󰡔后山集󰡕․󰡔朱語類輯󰡕․󰡔家禮輯遺󰡕․󰡔退溪先生詩箚錄󰡕 등이 전한다.
『全州柳氏大同譜』,
1차 작성자 :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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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97년 류벙휴(柳範休) 서간(書簡)

隱嶺 經几 執事 入納。
柳姨弟候狀 謹封。
丁巳 晦月 卄九日。
前者一宵承誨。尙覺警發
爲多。山川間之。書信又從而闊
焉。區區悵戀之懷。覺邇來
尤切也。歲窮寒緊。未審
靜養節宣加衛。
季房及子舍均穩否。三餘溫理
之工。想必有自樂。而可以及人者。
恨不能躬聽其餘緖也。從弟。日前
過伯母終祥。追痛亡堪。意外
除命臨門。病軀實不合復出世
路。而添書落批。恩數曠絶。恐
畢竟辭不得。屢日思惟。不敢不
趨肅。而似此屑屑。令人愧歎而已。
歲後渭陽之會。謂當從容討
懷。而此計又不諧矣。何歎如之。
后山翁。又棄後生。從此
吾嶺空矣。奈何奈何。自此
吾黨之望有歸。幸
益懋崇深。以慰
瞻仰。臨發呼
倩。不備。伏惟
下照。
丁巳 臘月 卄九日。姨從弟 範休 拜。

哀姪。奉遺稿委進計。
幸極意梳洗。以出正本。
其受賜多矣。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