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12월 29일에 姨從弟 柳範休가 안부를 물으며 관직에 제수된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위해 南漢朝에게 쓴 편지
1797년 12월 29일에 姨從弟 柳範休(1744~1823)가 안부를 물으며 관직에 제수된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위해 南漢朝(1744~1809)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는 지난 날 함께 공부했으나 겨울이 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만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또 이어서 수신자의 안부를 묻고 학문을 논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을 탄식하였다. 다음으로 자신의 근황을 전하면서 며칠 전 조모의 大祥을 치뤘다고 하였다. 이어 관직에서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特旨로 제수된 것이라 사양하지 못하고 謝恩肅拜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때문에 歲後에 있을 예정인 外叔의 모임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后山어른이 세상을 떠나 嶺南士林의 바람이 수신자에게 돌아가게 되니, 학문에 더욱 힘써 달라고 당부하였다.
발신자인 류범휴는 본관이 全州, 자는 天瑞, 호는 壺谷이다. 부는 柳道源이고 조부는 柳升鉉 으로 안동 水谷에 거주하였다. 東巖 柳長源․ 大山 李象靖의 문인으로 1780년에 生員이 되었다. 蔡濟恭․李湄․鄭宗魯․南漢朝 등과 교유하였고, 泗濱書院 등지에서 강의를 하였다. 禁府都事․司僕寺主簿․松禾縣監․安邊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1823년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저서로 壺谷集이 등이 전한다. 편지에서 류범휴가 받은 관직은 안변부사이며,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류범휴는 1797년 12월 20일에 안변부사로 제수되었다. 류범휴의 아들인 柳魯文이 쓴 『家世雜記』에 의하면 류범휴는 이 소식을 12월 26일에 들었다.
내용 중 ‘伯母終祥’은 류범휴의 조모인 光山金氏의 大祥을 말한다. 그녀는 金漢璧의 딸로 1795년(乙卯) 12월 27일에 졸하였다. ‘渭陽’은 『詩經』「渭陽」편에 춘추 시대 秦康公이 외숙인 晉文公을 이미 죽은 모친을 그리워하며 위양에서 전송하며, ‘내 외삼촌을 전송하려고 위양에 이르렀노라.[我送舅氏, 曰至渭陽.]’라고 노래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류범휴의 모는 안동 海底(현재는 봉화에 소재)의 義城金氏 丹砂 金景溫(1692~1734)의 딸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南漢朝(1744~1809)로 추측된다. 김경온은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金翼東((1716~1780)․素巖 金鎭東(1727~1807)․金斗東이고, 딸은 각각 南必容․류도원․李東殷․金一鍊과 혼인하였다. 류범휴가 姨從弟라 칭하였고, 『家世雜記』에 나타난 ‘隱嶺南叔’이라는 표현과 편지 피봉에 ‘隱嶺’이라고 쓴 것을 보아 수신자는 南必容의 아들 중 하나로 보인다. 남필용에게는 南漢朝와 南漢宗 두 아들이 있는데, 류범휴의 연배와 ‘우리 당의 바람이 존자에게 돌아간다.[吾黨之望有歸]’ 등의 표현으로 볼 때 남한조가 수신자로 추측된다.
남한조의 본관은 宜寧, 자는 宗伯, 호는 損齋이다. 상주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인 김진동에게 수학하였다고 한다. 중년에는 이상정의 문인이 되었다. 후에 문경의 선유동에 玉霞亭을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여러 번 暗行御史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損齋集이 전한다.
‘后山丈’은 李宗洙(1722~1797)이다. 이종수의 본관은 眞城, 자는 學甫, 호는 后山이다. 부는 李起三으로 안동 송리에 거주하였으며 이상정의 문인이다. 40여 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爲己之學에만 힘쓸 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저서로 后山集․朱語類輯․家禮輯遺․退溪先生詩箚錄 등이 전한다.
『全州柳氏大同譜』,
1차 작성자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