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윤 7월 7일에 注谷에 사는 趙述道가 손자를 잃은 마음을 위로하며 川沙 金宗德에게 보낸 편지
1786년 윤 7월 7일에 注谷에 사는 趙述道가 손자를 잃은 마음을 위로하며 川沙 金宗德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용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손자를 잃은 사천 김종덕의 마음을 위로하며 "芝坪의 遞夫가 이르러, 노형께서 獨孫의 상을 당하셨다고 하는데, 이 어찌 1~2년 내에 안정되고 화평한 가계겠습니까. 점차 참췌하고 무료해집니다. 본디 아드님의 나이가 늦지 않아 다시 낳아 기를 가망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노형께서 빠르게 백수가 되어 가시는데 눈앞에서 應門하며 책을 보고 塗鴉할 아이가 없으니 어찌 애타하며 늦었다는 탄식이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어서 한 해전인 1785년 4월에 죽은 사천의 아우인 金宗敬의 중상에 가지 못한 자신의 마음과 손자를 잃은 것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고, 완숙한 노년의 경계를 이루길 바라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담고 있다. "봄여름 두 절기에 장마와 가뭄의 備無에 모르겠습니다만, 부모님을 모시는 나머지 형제분들의 건강은 평안하신지요? 仲氏의 中祥이 이미 지나가니 인생이 다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찌 이런 사람을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매번 칩거에서 몸을 빼 빈소에 곡하고자 하지만 근래의 마음이 더욱 예전만 못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마음먹은 것도 일월을 넘겨버립니다. 이 또한 배움에 얻음이 없는 것이니 노년에 더욱 깊어지는 탄식을 어찌하고 어찌하겠습니까. 산거에 영외의 인사들을 접할 때마다 문득 노형의 경계가 더욱 완숙해지셨고 利養이 더욱 돈독하시다고 하니,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예전과 같습니다. 뜻밖에 비척(悲戚)은 마음속에 두지 마셔야 합니다. 저 또한 이 때문에 존형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헤아리고 헤아려 주십시오. 겨우 관솔불을 빌려 흐린 눈을 비비고 쓰느라 글자가 모양을 이루지 못했으니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편지의 예식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발신자 趙述道(1729~1803)의 字 聖紹이고 號 晩谷으로 아버지는 喜堂이다. 본관은 한양이고 영양에 살았다. 李象靖‧金樂行의 문하에 수학했으며, 1759년(영조 35) 아우 趙進道가 문과에 합격하고도 조덕린의 손자라는 이유로 削科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서를 탐독하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762년 月麓書堂을 창건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陶山書院長을 지냈다. 남인의 영수 蔡濟恭과도 교유했으며 채제공의 신원운동에 참여했다. 불교와 서학에 대한 비판서가 있으며 저서로는 晩谷集이 전한다.
수신자 김종덕(金宗德)의 자는 道彦이고, 호는 川沙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大山 李象靖의 문인 가운데 세칭 湖門三老(金宗德, 柳長源, 李宗洙)의 한 사람으로 퇴계 학통을 계승하여 이후 세대에 전해준 가교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상정의 유업인 「心經講錄刊補」를 동생 金宗敬과 함께 완성하고 「대산집」을 교정하였으며, 孺子亭에서 講學을 열어 李野淳, 李秉運 등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였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박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