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4월 12일에 대산 李象靖(1711~1781)이 松陰 柳和鉉(1712~1782, 대야 류건휴의 조부) 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상대의 아들들이 과거에 대비하여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기 위하여 보낸 편지
1776년 4월 12일에 대산 李象靖(1711~1781)이 松陰 柳和鉉(1712~1782, 대야 류건휴의 조부) 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상대의 아들들이 과거에 대비하여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이해 3월에 영조가 승하하여 국상에 따른 의례적 인사로 모든 신민의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하겠느냐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여 梅花雨가 내리는 4월에 상대와 중형의 안부를 묻고 상대의 아우가 여러 날 찾아와 함께 지냈으나 상중의 슬픔 때문에 조용히 회포를 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근근히 노쇠한 몸을 보전하고 있으나 마침 조그마한 일로 출입한 뒤로 피로가 심하여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하고 그러나 세월에 따른 결과이니 어찌 깊이 한탄할 것이 있겠느냐며 자위하였다. 또 상대의 아들들은 잘 지내며 나라에서 因山 이후에 과거를 열 것이라 들었는데 착실하게 모여서 공부하는지 상대의 손자도 편안한지 두루 안부를 묻고, 헤어진 지 오래 되니 그립다고 하였다. 끝으로 마침 인편이 있어 대강 안부를 묻는다 하며 형제분이 함께 살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발신인 李象靖은 1711년(숙종 37)∼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석학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관은 韓山. 자는 景文, 호는 大山. 아버지는 泰和이며, 어머니는 載寧李氏로 玄逸의 손녀이며 栽의 딸이다. 1735년(영조 11)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의 학문적 흐름은 아우 李光靖과 南漢朝를 통해 柳致明으로 이어지고, 李震相에 이르러 唯理論으로 전개되었다. 저서 및 편저로는 『四禮常變通攷』·『約中編』·『退陶書節要』·『心動靜圖』·『理氣彙編』·『敬齋箴集說』·『心無出入說』·『朱子語節要』·『密庵先生年譜』·『心經講錄刊補』·『延平答問續錄』등이 있다.
수신인 柳和鉉(1712~1782)은 자가 諧伯이고 호는 松陰이다. 문장 행의로 사람들의 중망을 받았다. 이 편지에서 언급된 아들들은 忠源, 敏源며 손자가 대야 柳健休이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