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년 3월 12일 유배 중의 金聖鐸이 이생원을 비롯한 여러분들에게 갑자기 세상을 떠난 南谷 족대부와 요절한 소년의 상에 조의를 전하고, 자신도 배소에서 痘症의 만연 때문에 피병 중에 불안하게 지내고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편지
1742년 3월 12일 유배 중의 金聖鐸이 이생원을 비롯한 여러분들에게 갑자기 세상을 떠난 南谷 족대부와 요절한 소년의 상에 조의를 전하고, 자신도 배소에서 痘症의 만연 때문에 피병 중에 불안하게 지내고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서간이다.
먼저 배소로 돌아온 후 해가 바뀌었는데도 소식이 끊기어 늘 그리워하던 중이었는데 뜻밖에 집에서 온 편지를 통해 여러분들이 이 봄철에 잘 지내심을 알게 되니 다행스럽다고 말문을 연 뒤, 상대 문중의 불행으로 남곡 족대부가 갑자기 세상을 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이가 요절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랍고 슬픈 마음을 그칠 수 없다 하고 인산의 변고에 아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하며 대현의 후예들이 이처럼 세상을 떠나니 하늘의 마음이 사람과는 다른 것인가 하며 애통해하였다. 자신에 대해서는 질긴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아 문득 소상을 지내게 되니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여도 미칠 수가 없다 하고, 더구나 두증을 피하여 우거하는 중에 봄 세 달이 지나려 하니 세월의 변화에 따른 사물의 변화를 볼 때마다 심경이 더욱 망극하다는 근황을 전하였다. 그리고 금년의 역병은 곳곳이 다 그러하여 고향에서 온 편지를 보니 再從弟 玉汝도 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고, 臨河의 從叔은 현재 병에 전염되어 앓고 있는 중이라 하여 놀랍고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대 쪽은 이러한 우환을 면하였는지 물으며,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어른 모시는 생활이 건강하기를 바란다는 말로 편지를 맺었다.
김성탁은 이 때 갈암 이현일을 위한 신원상소가 빌미가 되어 제주 旌義縣에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광양 섬진으로 이배되어 있었는데, 1740년 12월에 모친상을 입고 소상 때 조정의 허락으로 잠시 귀근한 후 다시 배소로 돌아가 있었다.
발신인 김성탁(1684~1747)은 본관은 義城, 자는 振伯, 호는 霽山이다. 영조 4년 李麟佐의 난에 창의한 공으로 按覈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고, 1734년 어사 朴文秀와 이조판서 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고,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李玄逸의 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 정의현에 유배되고,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霽山文集』 16권이 있다.
수신인 이생원은 미상이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