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년 11월 10일에 趙德鄰이 喪中에 있는 사돈을 위로하고 안부를 전하기 위해 生員 李時成에게 쓴 慰狀
1711년 11월 10일에 趙德鄰(1658~1737)이 喪中에 있는 사돈을 위로하고 안부를 전하기 위해 生員 李時成(1669~1725)에게 쓴 慰狀이다.
먼저 상중에 있는 이시성에게 미리 안부 편지를 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사위를 통해 그의 상중 안부를 전해 듣고 그를 위로하였다. 이후 자신의 근황을 전하며 鄭査兄이 끝내 돌아가셨다는 것과 子婦가 병의 위독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 사위와 딸이 길을 떠나는 것이 눈길에 염려된다는 마음을 전하였다.
발신자인 조덕린의 본관은 漢陽, 자는 宅仁, 호는 玉川이고, 영양에 거주하였다.(주실마을) 부는 趙頵이고, 葛菴 李玄逸의 문인으로 167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9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728년 李麟佐의 난 때에는 嶺南號召使가 되었으며, 이후 동부승지에 올랐다. 영조 연간에 당쟁이 격화된 가운데 남인의 입장에서 활동하다가 1737년에 탄핵을 받아 제주로 귀양 가던 중에 강진에서 사망하였다.
수신자인 이시성은 본관이 固城이고, 부는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한 李後榮(1649~1711)으로 안동 법흥동에 거주하였다.(임청각) 조덕린의 딸이 이시성의 아들인 李元鳳과 혼인하였다. 이시성은 당시 부친상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