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단오절에 柳炳文이 아우인 柳徽文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편지로 일용 문자에 대한 의견을 나눌 것을 제안하고, 성묘의 일과 아이들의 공부, 집안 내외의 대소사 처리를 상의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년 단오절에 柳炳文이 아우인 柳徽文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편지로 일용 문자에 대한 의견을 나눌 것을 제안하고, 성묘의 일과 아이들의 공부, 집안 내외의 대소사 처리를 상의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헤어진 지 열흘에 致喬가 돌아오고 柱兒[이름에 ‘柱’ 자가 들어가는 아이]가 뒤미처 도착하였는데 상대의 편지까지 받으니 갖가지로 위로가 된다 하고, 비가 흡족하게 내리지 않아 농부들이 실망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넉넉하게 내리기를 기대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형제가 모인 날이 적지 않았으나 매번 손님이 많아서 마주 앉아 문자를 토론할 수 없었다 하고,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을 만나더라도 의심나는 곳이나 새로 안 곳을 편지로 알려서 일용 생활에서 유의할 곳을 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자신은 눈병이 안약을 쓴 후에 조금 나아졌다고 하고, 아버지 제사는 혼자서 지내려니 시절이 변하였다는 감회가 있어 한스러웠다고 하였다. 또 『大山先生年譜』는 몇 차례 훑어보고 한 두 곳에 교정표를 붙여 두었다가 다시 생각하니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하고, 『蘆巖遺事』는 초고를 썼으나 그 사적이 분명하지 않아 배포할 수 없으므로 이대로 돌려줄 것이라 하였다. 柱兒의 공부는 말한 대로 하겠지만, 그 또래들이 날마다 꼬여내니 그 아이 또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하고, 산소를 둘러보는 일은 날짜를 정하여 모이는 것이 좋겠지만 날씨가 어떨지를 염려하였다. 漆田의 외숙이 가일[枝谷]로 시집간 그 셋째 딸을 잃었으니 인편으로 조문해야 할 터인데, 말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고, 맛재[午峴]의 대상에 만사와 제문을 부탁하는 사람이 많아 괴롭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주에서 季溫 씨가 와서 勿峰[양동마을]의 입지를 전하였는데 마을 내에는 모두 다른 탈이 없다고 하더라고 전하였다.
발신인 류병문(1766~1826)은 본관은 全州, 자는 仲虎, 호는 素隱이다. 아버지는 萬休이다. 柳長源의 문인으로 학문에 전념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 문집 『素隱集』과 『完山世牒』이 전한다.
수신인 류휘문(1773-1832)은 본관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이다. 할아버지는 柳正源, 아버지는 柳萬休이다. 9세에 仲父 柳明休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柳長源, 南漢朝, 鄭宗魯에게 수학하였다. 할아버지 류정원의 유작 『三山集』과 『易解參攷』를 교정하고, 스승 류장원의 저술인 『常變通攷』를 柳健休, 柳鼎文, 柳致明 등 문중의 학자와 10여 년에 걸쳐 교정한 끝에 58세 때 黃山寺에서 간행하였다.
『全州柳氏大同譜』,
『好古窩集』,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