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5월 그믐에 柳必永이 모인에게 보낸 편지로 『四書解』의 정서와 발문의 작성에 대하여 의논한 내용으로 보아 수신인은 大埜 柳健休(1768∼1834)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년 5월 그믐에 柳必永이 모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四書解』의 정서와 발문의 작성에 대하여 의논한 내용으로 보아 수신인은 大埜 柳健休(1768∼1834)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더위에 지쳐 혼곤한 가운데 정신을 깨워주는 편지를 보내준 데 대해 감사하고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편지 속의 스스로를 문책한 말에서 家學이 이어질 희망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하고 자신은 매년 봄여름이 교차할 때마다 기운이 떨어지는 증세가 올해는 더욱 심하여 흐릿한 상태를 분간하지 못하고 지낸다는 근황을 전하며 안타까워하였다.
이어서 『四書解』는 병을 앓는 여가에 두어 차례 정독하였지만 견식이 모자라고 정력이 소모되어 흘려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 교감의 일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하였는데, 당시의 초록을 글씨 솜씨가 뛰어난 자가 깨끗이 정서하는 것도 해로울 것은 없을 것이라 권유하였고, 跋文은 마땅히 정성을 다할 것이지만 아직 초안을 다 짓지 못하였다며 8월 들어 시원한 기운이 생기고 정신과 기력이 조금 깨어나면 베껴 보내겠다고 하였다. 말단에 말하였던 것은 그만 둘 수 없는 일인데 혐의할 것이 없다고 하며 말한 대로 글을 써 보겠다고 수락하였다.
발신인 柳必永이 수신인에게 가학이 이어질 희망을 보게 되었음을 치하하면서 과업을 장려한 말이나 『四書解』의 발문, 글의 내용 등을 의논한 말로 볼 때 이 편지는 사서해의 발간을 앞두고 저자인 柳健休의 후손이 먼저 보낸 서신에 답하여 보낸 답신으로 보인다.
발신인 柳必永(1841∼1924)의 본관은 全州, 자는 景達, 호는 西坡이다. 柳致明의 문인으로 權璉夏·李晩慤·金興洛·金道和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1919년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영남을 주축으로 한 한국 유림은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이때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항일 의지를 확고히 밝혔다. 이 거사를 전후해서 남도에는 郭鍾錫, 북도에는 柳必永이라는 뜻으로 南郭北柳라고 불렸다. 저서로 『서파문집』 26권 13책이 있다.
『사서해』는 柳健休가 四書에서 논의된 중요한 부분에 대하여 晦齋 李彦迪, 退溪 李滉 등 우리나라 先儒의 評註를 모아 엮은 『東儒四書解集評』 6권 3책을 가리킨다. 편찬 시기는 1762년(영조 38)경으로 보이는데, 권두에 柳必永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柳淵龜·柳淵昌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간행된 것은 이 편지가 쓰인 시기인 1900년대 이후로 추측된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