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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년 얼자(孼子) 석(惜) 덕상(德上) 긍석(矜石) 사석(士石) 분재기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10+KSM-XE.1717.0000-20180630.0730252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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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분재기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경제-상속/증여-분재기
작성주체 석, 덕상, 긍석, 사석
작성시기 1717
형태사항 크기: 39.5 X 61.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예천 저곡 안동권씨 춘우재고택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17년 얼자(孼子) 석(惜) 덕상(德上) 긍석(矜石) 사석(士石) 분재기
1717년(숙종 43) 4월 21일, 석(惜), 덕상(德上), 긍석(矜石), 사석(士石) 등 4명의 아들들에게 전답을 나눠주는 내용으로 작성, 발급된 분재기이다. 이 4명의 아들은 천첩(賤妾)에게서 낳은 아들들로서 무섬마을에 있는 전답을 개간한 이들이다. 서로 개간한 공을 두고 다투지 않도록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 모두에게 각각 논 4마지기와 밭 4마지기씩 나눠주는 내용이다.
1차 작성자 : 전영근

상세정보

1717년(숙종 43) 천첩 소생인 아들 , 德上, 矜石, 士石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분재기
1717년(숙종 43) 4월 천첩에게서 낳은 아들 넷에게 각각의 몫으로 전답을 나눠주는 내용으로 작성해 준 분급문기이다. 전답을 나눠주게 된 사연 뒤에 德上, 矜石, 士石의 몫을 이름 아래 列書하였다.
孼子들에게 분재하는 재산은 무섬마을의 전답으로, 비록 매득한 것이기는 하나 일부를 제외하면 천첩 소생들이 직접 수고를 들이거나 사람을 사서 개척해 놓은 것이 거의 20여 마지기에 달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분재의 사유는 이러한 사실과 아울러 해당 토지에 형제들의 노력이 섞여 있어 구별해 놓지 않으면 차후 다툼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미리 각각의 몫을 지워놓자는 의도에 있다.
의 몫으로는 東林 큰 방죽 아래 논 4마지기를 비롯해 밭 4마지기가 책정됐고, 德上의 몫도 논 4마지기와 밭 4마지기이며 矜石士石 역시 동일한 마지기 수의 논밭을 분배하였다.
별도의 증인과 필집 없이 財主인 부친이 직접 작성해 발급한 문서이다. 서명의 형태가 이 문서가 전래된 춘우재 문중의 분재기 중에 일치하는 것이 없으므로 발급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조선시대 分財文書의 작성과정과 그 특징, 문숙자, 영남학18, 2010
1차 작성자 : 전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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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년 얼자(孼子) 석(惜) 덕상(德上) 긍석(矜石) 사석(士石) 분재기

康熙五十六年丁酉四月二十一日。孼子。德上
矜石士石等處。分置成文爲臥乎事段。剡溪一區
雖曰買得是乎乃。田畓若干外。汝等或傭墾。或手劇。
盡爲開拓。將過卄餘斗落只。土地雖瘠。若不區別。似
有混雜爭鬧之端乙仍于。汝矣名乙。列書下。平均
別給是去乎。後此雜談是去等。用卞正事。
衿。畓。東林下大堰下。四斗落只。田。京式家墻外
路下。至獨山。合四斗落只。
德上衿。畓。峴外槐亭。高堤上。一大夜味下邊。及永立墓兩偏。合四斗
落只。田。京式木花田。至家後木花田。卽地。合
四斗落只。
矜石衿。畓。峴外槐亭上。四斗落只。南門外田。垂楊下。井
上邊。合四斗落只。
士石衿。畓。東林上。四夜味。李書房家後。竝四斗落只。
田。南門外。垂楊林下邊。五先田。蘇木亭。停所田以下。合四斗
落只。
財主。自筆。父。[着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