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3년에 永川에 사는 李錫華 등이 고을 관아에 올린 所志
1847년(영조 19) 3월에 永川에 사는 李台華 李錫華 등이 고을 관아에 올린 所志이다.
본 소지 본문에서 李錫華 등은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陶冶 아래에 새로 생긴 洑의 形止는 일전에 尺量하여 鄕色이 일일이 아뢰었으니,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해 홍수 이후 무너진 지점은 전혀 없고 흙이 쌓인 곳이 많습니다. 그 形止로 말하면 수백 명의 烟丁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올해에 이익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軍丁을 청하지 않은 것은 대개 喪葬으로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봄 농사가 이미 닥쳐오고 한 조각 땅도 금과 같은데, 이러한 기름진 상급의 땅을 등한시하고 묵힌다면, 개탄스러울 뿐 아닙니다. 부역을 도리어 그만두고 절실한 것에 나아가지 않으면, 더욱 난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달 초순 동안 軍丁 와서 부역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분명한 결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軍丁을 보내어 工役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아울러 鄭之汗 이라는 인물과 쟁송한 지점도 잘 측량해서 조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관아에서는 27일에 처결을 내렸는데, 동쪽의 조금 높은 지점은 鄭之汗의 자손에게 지급하고, 洑에 대한 공역을 위한 軍丁과 100개의 가마니를 보내주라고 지시하였다.
朝鮮時代 明文에 관한 文書學的 硏究, 김성갑,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1차 작성자 : 유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