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12일, 金思鎭이 상대방이 부탁한 기문을 보내기 위해 보낸 편지
1942년 6월 12일, 金思鎭(1878~1954)이 성명 미상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수신인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학업에 대하여 당부한 내용과 생몰 연대를 비교해 볼 때 박흥서(1885~1965)일 것으로 추정된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학문을 권장하고 상대방이 부탁한 기문을 보낸다는 것을 알린 내용이다.
초봄에 보냈던 편지 후로 소식이 막혔는데 어느덧 늦여름이 되었다 하고, 가뭄과 더위가 혹독한 날씨에 상대의 안부와 학업에 진척이 있는지 여부를 물으며 그에 대한 기대를 전하였다. 세사의 근심이 눈에 넘치는 데다 가뭄이 이토록 심하여 전에 없었던 상황을 맞았으니 자신은 문을 닫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분수이나, 상대방이 있는 곳은 이곳에 비해 더하여 번뇌가 더욱 심할 것인데 평탄히 지낼 방도를 찾았는지 걱정하였다.
德遠의 안부에 대해 물은 후, 배고픔을 참으면서 독서하는 것이 유학자의 본래 일이니 처지를 헤아려 분수에 따라 힘쓴 옛사람들처럼 서로 도와 힘쓰기를 희망하였다.
또 先齋의 記文은 근래에 이미 솜씨가 훌륭한 다른 사람에게 맡겨 闡揚하였는지 물었다. 당초에 상대의 부탁을 그 자리에서 허락하지 못하였던 것은 자신이 글을 짓는 데 졸렬하였기 때문이었으나, 간곡한 뜻을 저버릴 수 없어서 지금 글의 말미를 멋대로 차지한다 하였다. 그러나 상대가 아직 피차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 듯해서 마음에 송구하니, 자신이 서술한 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하고, 한 번 만나 상의하고 싶으나 구애되는 일이 많다고 하였다.
또 止庵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넓은 학문과 순박한 의표를 기리고, 상대방이 오랫동안 종유하였으니 더욱 애통해 할 듯하다 하였다.
발신인 김사진은 본관이 선성이며 字는 謹夫, 호는 西洲이다. 아버지는 龍奎이며 영주에 살았다. 金輝轍의 문인으로 1917년 李承熙, 丁敦燮 등과 함께 서간도로 건너가 德興堡에서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心卽理攷』, 『心理究源』, 『證雲陶書範』 등의 저술이 있다.
『潘南朴氏 判官公派 世譜』, 반남박씨 판관공파 종중, 2001.5.
『慶北儒學人物誌』, 한국국학진흥원, 영남유교문화진흥원, 2008.4.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