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6월 8일에 사돈 박종태(朴鍾泰)가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혼인과 관련된 일을 붇기 위해 조만기(趙萬基)에게 보낸 편지
1929년 6월 8일에 사돈 박종태(朴鍾泰)가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혼인과 관련된 일을 묻기 위해 조만기(趙萬基)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뜻밖에 당신의 막내 형제가 더위를 무릅쓰고 멀리서 방문하였고 더하여 당신의 편지도 전해주었는데 종이에 가득한 당신의 말씀이 안부를 묻는 것 외에 다양한 말이 있어서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고 하고 있다. 또한 상대방의 작은 아버지, 여러 형제, 여러 집안 사람들도 잘 지낸다고 하니 마음이 위로된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자신의 아버지와 식솔들은 큰 탈을 면하였고 여식도 예전대로 지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예식에 쓰일 물품의 경우에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고 또한 번거롭게 왕래할 필요가 없으니 혹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를 묻고 있다. 여기서 예식은 조만기의 둘째아들 조석칠(趙錫七)과 박종태 딸과의 혼인을 이야기한다. 끝으로 상대방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일의 형세를 살펴 뵙겠다고 하고 있다.
발신자 박종태(朴鍾泰, 1887~1959)는 본관 무안(務安) 이다.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일제의 주요기관을 파괴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수신인 조만기(趙萬基, 1881~1912)는 본관 한양(漢陽), 자는 맹목(孟睦), 호는 창사(倉斯) 이고 아버지는 조수용(趙銖容)이다. 1896년 외종형 이상룡(李相龍)과 의병 봉기 계획에 참여하였고 영양지역 의병장인 조승기(趙承基)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911년 가족을 데리고 중국 동삼성으로 건너가 경학사, 신흥학교 운영에 참여하였다.
이 편지는 한양조씨와 무안박씨 간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비록 조선이 멸망하였지만 향촌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이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