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7월 15일 朴定陽(1841~1904)이 문중 일에 대해 榮川[영주] 섬계[무섬마을, 수도리] 參議宅 朴齊淵(1807~1890)에 보낸 답장
1884년 7월 15일 朴定陽(1841~1904)이 문중 일에 대해 榮川[영주] 섬계[무섬마을, 수도리] 參議宅 朴齊淵(1807~1890)에 보낸 답장이다.
이른 가을에 지루한 비가 오는데, 영감 체후가 만왕하시기를 축원하였다. 자신은 날마다 많은 일로 골몰하지만 관아 제절이 안녕하니 다행이라고 했다.
名下錢에 대해서는, 이곳에 왔던 종친들께 말했지만, 급선무가 종이를 사는 일인데 영남의 여러 집안에서는 본처에서 종이를 사는 것이 두루 편하지 않을까 싶다면서, 지금 자신의 아버지가 尙州의 수령으로 있으니 영남의 여러 집안에서는 상주로 名錢을 모아서 종이를 사는 것이 온당할 것이라고 했다. 상주로 名錢을 모으면 單子와 함께 올려보내되, 名錢과 名單이 서로 틀리면 한둘이 틀리더라도 수단하지 않을 것이니 양해하라고 했다. 또 종이를 사서 올려 보낼 때 駄價가 들지 않을 수 없으니, 반드시 종이 운반비라고 말하지 말고 상주에서 한양으로 보내는 돈에 냥당 5푼씩을 운반비로 정례하여 상주로 보내는 것이 어떨까라고 하였다.
다른 편지와 함께 살펴보면, 이 해에 반남박씨 족보를 내기 위해 수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양에서 출판을 맡고 지방의 종친들이 비용과 명단을 제출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신인 박정양의 字는 致中이고 호는 竹泉이다. 1866년 문과에 급제하고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이조 참판과 협판교섭통상사무를 지낸 뒤 주미공사로 파견되었다. 갑오경장 이후 내무대신과 총리대신을 역임한 개화파의 지도자였다.
수신인 박제연의 字는 聖源, 號는 吾軒, 본관은 潘南이다. 어머니는 安東權氏이고, 부인은 의성김씨의 鶴峯 金誠一(1538∼1593)의 후예이다. 1840년 문과 급제했고, 병조참판, 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문집으로 『오헌유고』가 있다.
피봉에 '竹洞 謹謝書'라고 쓰여 있는데, 죽동은 박정양이 살던 마을이며, 박정양의 호가 竹泉이었다. 당대나 후대의 필요로 附記한 것인 듯하다.
『반남박씨 판관공파 세보』, 2001.,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