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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성혁수(成赫壽)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F.1857.4776-20170630.03722570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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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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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성혁수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작성시기 1857
형태사항 크기: 29.7 X 42.7
장정: 낱장
수량: 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57년 성혁수(成赫壽) 서간(書簡)
1857년 6월 14일에 성혁수(成赫壽)(1804~?)가 영양 주곡의 한양 조씨 집안에 보내는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안부를 묻고는, 영양 현감을 지내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요즈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사정이 딱하고, 돈이 돌지 않아 공납을 납부할 시일이 늦어진다고 하였다. 추신으로 말린 고기와 초[燭]를 보내니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의 제사 때 제수용품으로 써 달라고 했다. 그리고 조언육(趙彦育)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은 것을 나무라기도 했다. 이 편지에 딸린 별도의 편지는 세 통이 있다. 여기에는 당시 파견되었던 암행어사들의 명단, 이종병(李宗秉)이 죽고 한돈원(韓敦源)아산 현감(牙山縣監)에 제수되었다는 소식, 마을에 할당된 세금으로 포(布)를 내는 규정을 고치는 것에 관한 의견 등을 알리기 위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1857년 6월 14일, 成赫壽가 상대의 안부를 묻고 지방관 생활을 하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당시 파견되었던 암행어사의 명단, 洞布 개정에 관한 의견 등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857년 6월 14일에 成赫壽(1804~?)가 상대의 안부를 묻고 지방관 생활을 하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당시 파견되었던 암행어사의 명단, 洞布 개정에 관한 의견 등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본 편지 1건과 3건의 별지 및 피봉으로 구성된다.
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상대의 안부를 묻고, 상대의 아들의 병이 나았는지, 상대가 경주로 갔던 일은 잘 돌아왔는지 등을 물었다. 자신의 경우는 지방관을 지내면서 바쁘게 살고 있고, 요즈음 麥荒 때문에 백성들의 사정이 불쌍하게 된 데다가 錢荒마저 들어서 公納을 납부할 시일이 늦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현실과 생각이 어긋나 이러한 고통을 자초하고 있다고 했다. 추록에서는 脯와 초[燭]를 보내니 玉川 趙德鄰의 제사 때 제수로 써 달라고 했다. 또한 叔贊 즉 趙彦育은 자신에게 한 통의 안부편지도 보내지 않으니 글공부에만 심취해서 그러는 것인지 물었다.
첫 번째 별지는 당시 서울에서 파견되었던 繡衣御史[암행어사] 명단을 抄錄한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慶尙左道任應準, 慶尙右道徐相至
全羅左道成彛鎬, 全羅右道閔達鏞
忠淸左道金益容, 忠淸右道徐承輔
平安左道李正鉉, 平安右道李建弼
咸鏡道洪承裕
黃海道李裕奭
江原道李京鎬
京畿道洪鍾雲
명단을 기록하고 끝에 "윤5월 15일 전에 그들 모두 한양에서 출발하여 각지로 파견되었다고 합니다."라고 언급하였다.
두 번째 별지의 내용은 參判 李宗秉(1795~?)은 죽었고, 韓敦源(1820~?)은 散政을 통해 牙山縣監이 되었다는 소식을 기록한 것이다. 이종병은 본관은 韓山, 자는 朝干이다. 한돈원은 본관은 淸州, 자는 公兄이다.
세 번째 별지의 내용은 洞布 개정에 관한 내용이다. 지난번 汝南書院의 首席과 英山書院의 齋席이 자신을 찾아와 이번 가을부터 洞布를 거두는 규정을 바꾸자는 뜻을 이야기 했고, 또 향회를 열고자 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견해로는 이번에 쉽고 가볍게 이러한 의논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현재 麥荒이 든 뒤 끝에 백성들의 사정이 다급한데, 이와 같은 때에 무지한 백성들이 동포 개정의 속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규정만 고쳐서 그들에게 부담을 모두 떠맡기려는 계획으로 인식된다면 필시 소요가 일어날 것인데, 암행어사가 인근까지 왔기에 소요를 일으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密通을 보내어 즉시 일을 매듭지어야 하고, 이러한 뜻을 여남 수석과 영산 재석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기어이 향회를 하고자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대개 名布나 洞布를 막론하고 천천히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발급인 성혁수는 본관은 昌寧, 자는 公履이며, 부친은 永默이다. 그는 1854년 12월에 영양 현감에 제수된 이력이 있다. 따라서 이 편지가 발급된 해에도 영양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한양 조씨의 세거지인 주곡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첫 번째 별지의 내용을 통해, 예컨대 『철종실록』 1858년 3월 21일 기사에 경상우도 암행어사 서상지를 召見한 기록, 22일에는 경상좌도 암행어사 임응준을 소견한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면 대체로 1858년 이전에 이들이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별지에 기록된 윤5월은 철종연간 가운데 1857년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 편지의 발급연도를 최소 1857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汝南書院과 英山書院은 모두 영양에 있던 서원이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두 서원 모두 훼철되어 여남서원은 여남강당만 남았고, 영산서원은 이후 복원되지 못했다. 피봉에 언급된 수취인 정보로 '戶取閃'은 불분명하나, 여타 明文 등의 문서에 자주 나오는 "戶某宅"의 용례로 미루어 보면 "戶奴 取閃의 상전댁"이라는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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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57년 성혁수(成赫壽) 서간(書簡)

謹拜候上。戶取閃。
向來浹月之雨。近年初見。今旣
開霽。夏日亦可愛也。阻莫近若。
瞻咏益勞。伏惟玆際。
靜候連護毖重。聞有唯憂數
朔沉綿。近得勿藥之喜耶。東京
之旆穩旋。而餘憊夬蘇否。以吾
春夏鞍馬千里之勞。深知同病之憐
也。少弟。一味擾汨。而麥荒而民情
可矜。錢荒而公納此遲。都不如歸
臥北牕淸風。而事與心違。
受此無限困苦。滄浪也。
奈何奈何。爲探起居。
姑不備禮。
六月 小望日。少弟 赫壽 拜拜。

脯燭送呈。助
用來月
玉川祀需。如何。

叔贊亦一不存訊。汨汨於尋行
數墨而然歟。可憎可恨。

繡衣抄。
慶尙左 任應準 徐相至
全羅左 成彛鎬 閔達鏞
忠淸左 金益容 徐承輔
平安左 李正鉉 李建弼
咸鏡道 洪承裕
黃海道 李裕奭
江原道 李京鎬
京圻 洪鍾雲
閏五月望前。幷自京發遣。

李參判宗秉長逝。
敦源
散政爲牙山縣監耳。

向者。汝南首席英山齋席。幷以自今秋改爲洞布之意
來言。且欲鄕會云。鄙見則今不必輕易議到。見今麥荒之
餘。民情遑急。如此之際。無知愚氓不詳裏面。只知釐正戶
布。使之全責於渠輩之計。必將荷擔而去。倡爲騷擾之說。則
豈非難於防川耶。且虎行迫近。有騷擾。不如無騷擾。玆
以密通。覽卽結繩。而第以此意。傳于汝南首席英山齋
席。似好耳。期欲鄕會。則亦不可挽止。而大抵無論名
布洞布。徐徐議之。未知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