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6년 11월 27일 표종질 金羲壽가 외삼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외삼촌 형제분께 통탄스러운 마음과 함께 상대방도 몸과 마음을 손상하지 말라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위로 편지
1826년 11월 27일 표종질 金羲壽(1760~1848)가 외삼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외삼촌 형제분께 통탄스러운 마음과 함께 상대방도 몸과 마음을 손상하지 말라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위로 편지이다.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숙의 상사는 매우 통곡스럽다고 하면서, 팔십의 높은 나이는 천수이지만 형제분들이 늘그막에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애통함은 어찌 다만 우애 깊은 형제들의 침통한 회포에 그칠 뿐이며, 어떻게 슬픔을 억누르겠습니까라고 했다.
외삼촌의 환후는 비록 오랫동안 낫지 않을 것이었으나 평일의 기력이 강건하여 오랫동안 사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인사의 어긋남에 대해 애통해 하였다. 누가 외숙과 생질이 없으리오만은 본인과 외숙과는 특별함이 있었다고 했다. 본인이 6~7년 영양 丹谷에 우거할 때 외숙을 자주 찾아뵙고 문안드릴 때 마치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다시 뵙는 것 같아서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는 도리를 거의 이룬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 기뻐서 스스로 의지하고 우러르는 곳이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고향에 돌아온 뒤에 뵙는 것이 띄엄띄엄해질 것을 몰랐다고 했다. 매번 곧바로 가서 안부를 살펴야 했으나, 병이 들고 또 타고 갈 말이 없어서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雨谷의 종이 돌아와 병의 증세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신명이 도와서 곧 회복될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고 했다. 갑자기 외숙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영결하기 전에 뵙지 못할 것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외숙이 돌아가시어 이생에서는 다시 어머니를 볼 수 없는 거 같아 통탄스럽다고 했다. 이불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며 앓던 날에 부고를 받고 형제가 즉시 우곡으로 가서 표종질녀를 보고 손을 잡고 통곡하니 그의 정황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고 했다. 곧바로 염과 빈소를 차리기 전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기력을 억지로 할 형세가 못된다고 했다. 이미 지나간 모든 일이 어그러졌다고 하며 나머지는 더욱 스스로 너그럽게 위로하여, 절도를 손상하는데 이르지 않아서 멀리 있는 저의 정성에 부응해 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끝맺었다.
발급인 김희수의 자는 以凝, 호는 東園, 본관은 의성이다. 초시에 합격했으며, 선조의 별업이 있는 영양 丹谷에 우거하여 향중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 돌아가신 외숙을 가까이서 자주 뵈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