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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이해영(李海永) 외 1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F.1821.4777-20170630.03722570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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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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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해영, 이해덕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작성시기 1821
형태사항 크기: 29 X 41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21년 이해영(李海永) 외 1인 서간(書簡)
1821년 12월 6일에 이해영(李海永)(1775~1827), 이해덕(李海德)(1779~1858)이 쓴 편지이다. 상대가 병에 걸려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이어서 상대측 집안에서 『만곡집(晩谷集)』을 인쇄되어 배포한 소식을 들었는데, 자신들은 그 일을 돕는 자리에 찾아가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했다. 또한 상대의 친척 어른께서 조상의 글이 『번암집(樊巖集)』 안에 수록할지 여부를 두고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하러 간 일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했다. 나머지는 부모님의 건강문제, 아우의 병이 든 상황, 자신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내는 상황 등을 전했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1821년 12월 6일, 李海永 외 1인이 안부를 주고받고, 상대측 『晩谷集』 간행 때 자신들이 찾아가지 못한 점, 『樊巖集』에 상대측 先祖가 쓴 글을 수록하는 데 대한 의견 등을 알리고자 쓴 편지
1821년 12월 6일에 李海永(1775~1827), 李海德(1779~1858)이 안부를 주고받고, 상대측 『晩谷集』 간행 때 자신들이 찾아가지 못한 점, 『樊巖集』에 상대측 先祖가 쓴 글을 수록하는 데 대한 의견 등을 알리고자 쓴 편지이다.
상대와 만나지 못한 회포와 그리움에 대해 언급을 하며, 이날 사돈을 만나 상대가 병이 들어 생활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晩谷集』이 이미 인쇄되어 배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우리 斯文의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쇠퇴하고 더딘 자신들은 그 일을 돕는 말석에라도 몸소 찾아가지 못했으니, 매우 포만함이 심하다고 하였다. 문집을 열람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또한 그렇게 할 길이 없어서 늘 한스럽다고도 했다. 상대의 친척 어른께서 선조에 관한 일로 천 리 먼 길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樊巖集』 안에 선조의 글을 놔둔다거나 뺀다거나 하는 일이 과연 그 본가의 의사에만 달려있는 것인지 반문하면서 세상의 도리가 험해졌음을 탄식하였다. 자신의 경우는 부모님의 건강문제 때문에 매우 마음 졸이고 있고, 아우도 추위로 인해 병이 든 상황, 자신도 쓸데없는 근심걱정으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등 근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늘 상대가 맑은 창 아래에서 이치를 복습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생각하면 부럽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좋은 말씀을 아끼지 말고 때때로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당부하였다.
발급자 李海永은 본관은 載寧, 자는 錫汝, 호는 林廬이다. 부친은 宇鳴이고, 생부는 宇亨이다. 저서로 『林廬遺稿』가 전한다. 李海德은 본관은 재령, 자는 士珍, 호는 餐霞이고, 부친은 宇亨으로 海永의 아우이다. 본문에서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戚弟'라는 표현을 했는데, 한양 조씨 옥천종택 문중의 혼반관계를 보면 玉川 趙德鄰의 증손인 趙居善의 배위가 재령 이씨 輝遠의 딸인 것으로 미루어 수취인은 조거선과 비슷한 대의 한양 조씨 문중의 인척 쯤 되는 인물들로 볼 수 있다.
'晩谷'은 趙述道(1729~1803)의 호이며, 玉川 趙德鄰의 손자이다. 『晩谷集』은 조술도의 조카 趙居信(1749~1826)이 그의 유문을 수습하고 立齋 鄭宗魯의 교감을 거처 1821년에 간행되었다. 총 9책 17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종로의 序文 및 定齋 柳致明, 晦屛 申體仁, 조거신 등이 쓴 제문이 실려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만곡문집』 간행을 축하하는 내용을 통해 이 편지의 수취인은 조거신 또는 그와 비슷한 항렬의 인물이거나 바로 아랫대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樊巖集』의 경우는 蔡濟恭 사후 바로 문인들에 의해 遺稿의 수습과 교정을 거쳤으나 正祖 사후 純祖 대에 이르러 西學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淸南 계열이 대거 숙청되면서 채제공 역시 관작이 추탈되었고, 따라서 문집간행도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1821년 정조비 孝懿王后의 因山 이후 채제공 신원의 조짐이 있어서 아들 蔡弘遠, 문인 柳台佐 등을 중심으로 유고 간행 준비에 들어갔고, 1823채제공의 관작이 회복된 후 1824년에 간행되었다. 이 편지가 발급된 해인 1821년은 『번암집』 간행을 착수했던 시기였고, 본문에서 "상대 측(한양 조씨 측) 친척 어른이 선조의 일로 먼 길을 떠났다", "『번암집』에 내용을 넣고 빼는 일은 어찌 채씨 본가 측의 의사에만 달려있는 일인가?"라고 한 말을 통해 채제공이 쓴 옥천 조덕린의 墓表 등의 글이 『번암집』에 수록 될지 여부에 대해 채씨 측과 조씨 측 간에 의견이 엇갈린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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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21년 이해영(李海永) 외 1인 서간(書簡)

春間一進。太半爲
吾兄奉敍計矣。適値惟憂涉疑。未
克遂意而歸。吾輩一會合。亦有數存
耶。屬此歲暮。尤不禁慕徒之懷。
卽接査兄。叩認
美愼尙爾彌留。仰爲溯愍。然調護旣
得宜。且不妨於杜門觀玩。惟以是奉慰
耳。
晩谷先生集。承已繡而布焉。斯文之幸大
矣。顧此頹緩。未遂躬問於相役之末。殊
甚逋慢。第一番奉閱。是尋常所願言
者。而亦無路焉。則繼切歎恨之私耳。
仂春戚侍。承以先事。啓千里遠
行。未知樊集存拔。果係於其本家
否耶。只歎世道之愈險。而天定之無期
也。奈何奈何。戚弟。侍事善違。已極煎熬。
而舍弟呻喟。當寒每劇。添得鬢華。
見甚悶然。賤軀亦長汨冗憂者。寢與黃
妳分疎。每想
晴牕溫理之
樂。未嘗不羨
仰。幸不惜牙
頰。時賜提
諭於自得之餘。
則感頌當如
何哉。千萬切望。
惟冀益懋
崇深。用副
眞禱。不備。
伏惟
下在。謹拜候上狀。
辛巳 十二月 六日。戚弟 李海永 海德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