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12월 6일, 李海永 외 1인이 안부를 주고받고, 상대측 『晩谷集』 간행 때 자신들이 찾아가지 못한 점, 『樊巖集』에 상대측 先祖가 쓴 글을 수록하는 데 대한 의견 등을 알리고자 쓴 편지
1821년 12월 6일에 李海永(1775~1827), 李海德(1779~1858)이 안부를 주고받고, 상대측 『晩谷集』 간행 때 자신들이 찾아가지 못한 점, 『樊巖集』에 상대측 先祖가 쓴 글을 수록하는 데 대한 의견 등을 알리고자 쓴 편지이다.
상대와 만나지 못한 회포와 그리움에 대해 언급을 하며, 이날 사돈을 만나 상대가 병이 들어 생활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晩谷集』이 이미 인쇄되어 배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우리 斯文의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쇠퇴하고 더딘 자신들은 그 일을 돕는 말석에라도 몸소 찾아가지 못했으니, 매우 포만함이 심하다고 하였다. 문집을 열람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또한 그렇게 할 길이 없어서 늘 한스럽다고도 했다. 상대의 친척 어른께서 선조에 관한 일로 천 리 먼 길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樊巖集』 안에 선조의 글을 놔둔다거나 뺀다거나 하는 일이 과연 그 본가의 의사에만 달려있는 것인지 반문하면서 세상의 도리가 험해졌음을 탄식하였다. 자신의 경우는 부모님의 건강문제 때문에 매우 마음 졸이고 있고, 아우도 추위로 인해 병이 든 상황, 자신도 쓸데없는 근심걱정으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등 근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늘 상대가 맑은 창 아래에서 이치를 복습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생각하면 부럽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좋은 말씀을 아끼지 말고 때때로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당부하였다.
발급자 李海永은 본관은 載寧, 자는 錫汝, 호는 林廬이다. 부친은 宇鳴이고, 생부는 宇亨이다. 저서로 『林廬遺稿』가 전한다. 李海德은 본관은 재령, 자는 士珍, 호는 餐霞이고, 부친은 宇亨으로 海永의 아우이다. 본문에서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戚弟'라는 표현을 했는데, 한양 조씨 옥천종택 문중의 혼반관계를 보면 玉川 趙德鄰의 증손인 趙居善의 배위가 재령 이씨 輝遠의 딸인 것으로 미루어 수취인은 조거선과 비슷한 대의 한양 조씨 문중의 인척 쯤 되는 인물들로 볼 수 있다.
'晩谷'은 趙述道(1729~1803)의 호이며, 玉川 趙德鄰의 손자이다. 『晩谷集』은 조술도의 조카 趙居信(1749~1826)이 그의 유문을 수습하고 立齋 鄭宗魯의 교감을 거처 1821년에 간행되었다. 총 9책 17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종로의 序文 및 定齋 柳致明, 晦屛 申體仁, 조거신 등이 쓴 제문이 실려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만곡문집』 간행을 축하하는 내용을 통해 이 편지의 수취인은 조거신 또는 그와 비슷한 항렬의 인물이거나 바로 아랫대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樊巖集』의 경우는 蔡濟恭 사후 바로 문인들에 의해 遺稿의 수습과 교정을 거쳤으나 正祖 사후 純祖 대에 이르러 西學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淸南 계열이 대거 숙청되면서 채제공 역시 관작이 추탈되었고, 따라서 문집간행도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1821년 정조비 孝懿王后의 因山 이후 채제공 신원의 조짐이 있어서 아들 蔡弘遠, 문인 柳台佐 등을 중심으로 유고 간행 준비에 들어갔고, 1823년 채제공의 관작이 회복된 후 1824년에 간행되었다. 이 편지가 발급된 해인 1821년은 『번암집』 간행을 착수했던 시기였고, 본문에서 "상대 측(한양 조씨 측) 친척 어른이 선조의 일로 먼 길을 떠났다", "『번암집』에 내용을 넣고 빼는 일은 어찌 채씨 본가 측의 의사에만 달려있는 일인가?"라고 한 말을 통해 채제공이 쓴 옥천 조덕린의 墓表 등의 글이 『번암집』에 수록 될지 여부에 대해 채씨 측과 조씨 측 간에 의견이 엇갈린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작성자 :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