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3월 13일, 예천 저곡의 權重威 외 7인이 상대의 형제 상을 당한 슬픔을 위로하고, 玉川 趙德鄰의 復官과 磨岩 趙進道의 科牒이 還授된 일 등을 축하하며, 문중 젊은이를 통해 편지와 부조를 보내기 위해 注谷에 보낸 편지
1789년 3월 13일에 예천 저곡의 權重威 외 7인이 상대의 형제 상을 당한 슬픔을 위로하고, 玉川 趙德鄰의 復官과 磨岩 趙進道의 科牒이 還授된 일 등을 축하하며, 문중 젊은이를 통해 편지와 부조를 보내기 위해 注谷에 보낸 편지이다.
처음 상대가 형제의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알았지만 위로하러 가지 못했다고 하고 매우 슬퍼하는 마음을 전했다. 이어서 요즈음 상대의 선조이신 玉川 선생의 官誥가 내려져 관작이 회복되었고, 이로 인해 상대의 형제인 趙進道 역시 빼앗겼던 科牒을 돌려받게 된 일에 대해 매우 축하하였다. 다음으로 상복을 입고 있는 상대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들의 경우는 상대측 상례에 조문하고 선조의 복관 등의 일에 축하하러 찾아가야 하지만, 인근에 유행하는 역병과 중첩되어 생기는 喪慘 때문에 갈 형편이 못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중의 한 젊은이를 보내 편지로 예를 대신한다고 하였다. 추록으로는 100文 돈을 부조한다고 하였다.
옥천 조덕린은 1725년 당쟁의 폐해와 노론의 득세에 관해 논한 10여조를 상소했다가 鍾城에 유배되었고, 1727년 丁未換局 때 풀려났다. 하지만 이후 1736년에 1725년의 상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았고, 1737년 金聖鐸의 葛庵 李玄逸 伸救上疏에 연루되어 濟州로 유배 가던 도중에 康津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후 1738년에 사면되었고, 1750년, 1756년 두 차례 관작이 회복되었다가 환수되는 과정을 거쳐 1788년에 완전히 신원되었지만, 1803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결국 1899년에 와서야 특명으로 復官되었다. 이 편지가 발급된 해인 1789년은 바로 전 해인 1788년 조덕린의 복관과 그의 손자 磨岩 趙進道(1724~1788)의 과첩이 환수된 이후였고, 저곡의 권씨 8인은 이것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788년에 조진도가 사망하는데, 이들 형제 가운데 月下 趙運道(1719~1796), 晩谷 趙述道(1729~1803)가 당시 생존해 있었으므로, 수취인인 '注谷 僉服史'는 조운도와 조술도 형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피봉의 발급인 관련 기록인 '渚谷 權戚'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인들은 예천 용문 저곡에 세거한 안동 권씨 문중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발급인 8인 가운데 이력이 자세한 인물로 權聖鳳(1733~1804)은 본관은 安東, 자는 時見, 호는 龍岩으로, 부친은 重寅이다. 權聖翊(1735~1821)은 자는 文瑞, 호는 延谷이며, 부친은 重斗이다.
1차 작성자 :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