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9월 22일, 餘窩 睦萬中이 안부를 주고받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樊巖 蔡濟恭과 강론한 일에 관한 글을 짓는 일을 알리고자 趙承旨宅에 보낸 편지
1783년 9월 22일에 餘窩 睦萬中(1727∼1810)이 안부를 주고받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樊巖 蔡濟恭과 강론한 일에 관한 글을 짓는 일을 알리고자 趙承旨宅에 보낸 편지이다.
처음 여러 객들 때문에 시끄럽던 와중에 상대와 만났다가 이별했던 것이 어느덧 2년을 넘었다고 하면서 그리운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연래에 상대의 조카와 서로 알게 되었으니 또한 고결한 선비를 그리워하던 마음에 흡족히 위로되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상대의 편지를 받고 이를 통해 상대의 안부를 확인하였다고 했다. 자신의 경우는 질병과 우환 때문에 쇠잔하게 지낸다고 하면서, 상대는 자신보다 수년 연장자이면서 도를 닦고 출세나 욕심을 버리고 지내는 점을 부러워하였다. 상대가 하교해 준 樊巖公에 관한 일은, 뜻을 다해 글을 지어 문단에 소속된 여러 선비들의 언행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강론할 적에 상황을 따라 마음을 일깨울 수 있었지만, 글을 완성하는 데에 더디고 빠름을 어찌 미리 헤아릴 수 있겠냐고 하였다. 상대가 보내준 차와 건어 등의 음식을 받았는데, 집은 가난하고 사는 곳은 멀리 떨어진 마당에 어찌 이러한 물건을 보내주셨냐고 하면서, 매우 마음이 편안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다.
발급인 목만중은 본관은 泗川, 자는 幼選, 호는 餘窩이다. 睦天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睦慶衍이고, 아버지는 睦祖禹이다. 1759년 별시에 급제하였다. 1786년 黃海都事로 있으면서 重試에 급제, 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후 兵曹參議, 僉知中樞府事, 同副承旨, 漢城府右尹, 同知中樞府事, 大司諫, 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신유옥사 이후 攻西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남인 문단에서 艮翁 李獻慶, 樊巖 蔡濟恭, 石北 申光洙, 海左 丁範祖, 惠寰齋 李用休 등과 교유하였고, 채제공의 楓壇에 참여, 또는 詩社 등을 결성하여 詩作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 편지의 발급 연도인 1783년은 시사를 통해 사우들과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시기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번암공에 관한 일'은 채제공 및 여러 사우들과 강론 및 시회를 가지면서 이에 관한 글을 작성하는 일로 보인다. 저서로는 『여와집』이 있다.
피봉에서 언급된 '近民堂'의 경우 보통 관청의 東軒에 붙는 명칭으로 시기상 1779년 발급인이 황해 도사 재직 시 감영에서 이 편지를 작성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수취인 정보로 언급된 '趙承旨宅'의 경우 玉川 趙德鄰이 승지를 역임한 이력이 있으므로 조덕린의 집안에 보내는 편지임을 알 수 있다. 저자와 연배가 비슷한 집안 인물 가운데 조덕린의 손자로 月下 趙運道(1719~1796), 磨岩 趙進道(1724~1788), 晩谷 趙述道(1729~1803) 등이 있다. 발급인이 상대에 대해 '수년 연장자'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루어 수취인은 조운도나 조진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편지 첫머리에 상대의 편지를 가져다 준 상대의 조카는 趙居信(1749~1826) 또는 趙居善(1738~1807) 등일 가능성이 높다.
1차 작성자 :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