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 7월 17일, 영양 注谷에 살고 있는 손자 趙性道가 함경도 종성에 유배중인 趙德鄰에게 보낸 안부편지
1727년 7월 17일, 영양 注谷에 살고 있는 손자 趙性道(1707~1757)가 함경도 종성에 유배중인 趙德鄰(1658~1737)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 부친들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연달아 4월 두 차례 내려주신 편지를 5월 보름 후와 6월 그믐 전에 받았다고 했다. 이러한 때에 기거하시는 체절을 잘 알겠습니다만 북단 3천리 산해를 두고 멀리 떨어져 심부름꾼도 수개월이 걸려야 이를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잠시라도 우울한 마음을 풀 수 없다고 했다.
올 여름의 폭염이 예년에 비해 배나 혹독한데, 북쪽의 추위를 막는 집은 더운 날 살기 적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객중에 기체후는 또 어떠한지 물었다. 남북으로 떨어져 우러르며 미치지 못하니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다.
이어 조정의 상황을 알려 주어 조부가 곧 유배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편지 내용은 천도가 좋게 돌아오고 있으니, 다행이고 임금이 을사년 이후로 유배된 사람들을 방송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비록 길에 떠도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낭설 같지는 않다고 했고, 이미 군대가 길에 올라 며칠이면 조부가 계신 곳에 당도할 것이며, 군대가 돌아 올 때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기에 해당하니 모름지기 기쁘고 즐거운 모습에 끝이 없다고 했다. 천은이 갖가지로 이에 이르러 감격의 눈물이 난다고 했다.
조성도는 주곡 마을의 여러 소식도 전했다. 종가의 喪禍가 연달아 겹쳤는데, 長皐 할아버지, 烏川 할머니, 川前 숙모 상이 한달 사이 연달아 일어나서 매우 비통한데, 만리 밖에서 이런 소식들을 들으면 사물에 닿는 정리가 더욱 되살아날 것이니 어찌하고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곡 마을의 돌림병이 이미 사그라졌고, 종조부님의 환후도 이미 더칠 조짐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季父의 초례는 무사히 치렀지만, 여름 초에 외중숙의 상을 당하여 舊感과 新愴이 서로 갈마든다고 했다. 게다가 외왕모께서는 疚懷가 너무 심하여 기식이 엄엄하다고 했다. 밖에서 마음 졸이시는 할아버지를 염려하면서 나머지 사연은 찾아뵙고 머물면서 모두 아뢰겠다고 했다. 먼 길 행차에 어긋남이 없이 빨리 돌아오시어 주야의 바람에 부응하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끝맺었다.
편지의 수급자 조덕린의 자는 宅仁, 호는 玉川, 본관은 한양이다. 1677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1691년 문과 급제한 이후 교리·사간 등을 역임했고, 1725년 弼善으로 당쟁의 폐해를 상소한 문장 속에 노론의 득세를 비난한 내용이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함경도 鐘城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부응교에 등용된 이후 동부승지까지 올랐으나 1736년 서원의 濫設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이듬해 제주에 귀양 가던 도중 강진에서 죽었다.
1차 작성자 : 박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