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 11월 18일에 從弟 柳正時가 상대를 만나지 못하여 서운하고 한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아울러 자신의 근황 및 아우의 안부를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727년 11월 18일에 從弟 柳正時(1660~1732)가 상대를 만나지 못하여 서운하고 한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아울러 자신의 근황 및 아우의 안부를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을 보지 못한 이유를 여러 가지를 들어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째는 귀양 갈 때 병이 들어 상대방을 전송하지 못했고, 둘째는 지금 죄가 사면되어 돌아온 날에 또 먼 길 가는 것 때문에 병들고 쇠잔한 근력이 때에 임하여 구불구불 돌아가기가 어려워, 지레 돌아오기를 면치 못했다고 하면서 앞뒤에 서운하고 한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맺혀 있다고 하였다. 원문에 나오는 泣玦은 귀양을 뜻하고, 賜環은 죄를 용서하여 召還하는 것인데, 옛날 죄를 지은 신하가 귀양을 가 있을 때 임금이 다시 소환하고 싶으면 環을 내려 주었고, 영원히 결별하고 싶으면 玦을 내려 주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어서 일전에 德若의 편지를 받아보고서 이미 당신을 찾아가 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당신의 건강이 전보다 좋아졌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바로 이른바 '嶺海가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기쁘고 축하드린다고 하였다. 다만 해가 세 번 바뀌고 人事가 한번 변함에 작년에 죽은 '勉'자 들어간 사촌이 유독 홀로 있지 못했고, 친구가 환영하는 날과 그 다른 지친 간 대소의 상척이 거듭 이르러 고향에 겨우 돌아왔으니, 아마도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데, 근년에 喪禍가 많이 겹쳐 겨우 처의 기일을 지냈으며 며느리의 상이 닥쳐 가는데 늘그막의 심정이 갈수록 더욱 난감하다고 하였다. 근래 천리 길의 행차는 나 같이 늙어 병이 든 자가 망령스러운 일이라 이를 수 있으나 상을 당한 나머지 마음 터놓을 데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 달 10일 뒤 내행을 따라 동쪽으로 와서 추위를 무릅쓰고 어렵게 오느라 겨우 쓰러지는 것을 면했으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만 깊은 관아[深衙]에 죄수처럼 앉아 있는데 또한 매우 외롭고 쓸쓸하니 고민되고 고민된다고 하였다.
끝으로는, 둘째 아우가 이 한가로운 읍을 얻은 것은 관직에 숨었다[吏隱]라 할 만하다고 하면서 그의 안부도 상대방에게 전하고 있는데, 다만 경향의 친구들이 몰려들어 응접하기가 날로 괴로워하였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병이 날 것 같으니 걱정할 만하다고 하였다.
추록으로는 藎久 여러 사촌들에게 각각 편지를 쓰지 못했으니, 이 편지를 돌려 보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발급인 류정시는 증조가 柳友潛이고, 조부는 柳嵩, 아버지는 柳東輝이며, 어머니는 漢陽趙氏로 趙廷珩의 딸이다. 아우는 涵碧堂 柳敬時(1666~1737)이다. 「梧溪書堂上樑文」를 지었는데, 오계서당은 전주류씨 함벽당 종택에서 지은 서당이다. 상량문에 근거해보면, 이 서당은 집안 자제들이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연마하기 위해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상량문에서 이 서당을 세워서 많은 인재가 양성되고 유교적 인격을 갖춘 선비들이 배출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김선주